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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조선의 그리스도교 발자취 따라

그리스도교 발자취 따라 

대원군이라는 이름에서 우리는 한국 그리스도교의 과거를 떠올렸다. 그것은 전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틀어 가장 영광된 시절이었다. 이것이 우리가 용산을 좀처럼 떠나지 못한 이유다. 이 역사, 정말 남다른 데가 있다. 18세기 말까지, 십자가가 단 한 번 이 은둔의 나라를 혜성처럼 짧게 비추고 지나간 적이 있다. 16세기 말이다. 당시 일본에서 정점을 찍은 그리스도교는 참혹한 박해의 시대로 치닫고 있었다. 일본의 그리스도인은 이미 백만을 헤아렸다. 그러나 해협 저편 조선 땅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한 마디로 전해지지 못했다. 그리스도교가 중국에서 맺은 알찬 결실도 겁에 질려 밋장을 지른 반도의 경계를 한 톨도 넘지 못했다. 1592년, 일본이 조선 정벌을 시도할 때 병사들 중에는 그리스도인이 허다했다. 예수회의 세스페데스 신부가 그들을 따라왔지만, 전쟁은 그리스도교 전파에 좋은 기회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세스페데스 신부도 적국을 정신적으로 정복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성과없이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 중에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가 많았다. 나가사키의 '거룩한 산'이 그리스도인의 피로 물든 1622년과, 그리스도인 수천 명이 파펜베르크 곶 해안 절벽에서 물보라 속으로 몸을 날린 1637년에, 그들도 함께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그 어느 때보다 어두운 영혼의 밤이 그 후 200년 동안 지속되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십자가는 빛을 잃은 듯했다. 때는 1777년이었다. 조선의 몇몇 학자가 관습에 따라 불교 사찰에 모여 승려의 보살핌을 받으며 학문적 담론을 나누었다. 책 한 권이 손에 들어왔다. 그리스도교에 관한 이 한문 서적은 그들에게 매우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이런 책은 가끔 사신들이 은밀히 숨겨 들어오곤 했다. 그 책에는 하느님과 영혼 불멸과 계명에 대한 흥미 있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공자 같은 학자도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깨우침도 주지 않았다. 공자의 가르침은 현세 종교에만 국한되어 있다.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윗사람과 아랫사람, 남편과 아내, 그리고 벗들끼리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다. 하느님과 내세에 관해서는 한마디의 단서도 남겨 놓지 않았다. 많은 것이 확연해졌으므로, 모임에 참석한 학자들은 그 책에 담긴 가르침에 따라 살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함께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바쳤고 주일을 지켰다. 알아듣기 어렵고 신비스런 내용도 물론 많았다 그 무렵 우리 학자들의 지인 가운데 한 사람이 베이징 연례 사신단의 일원에 임명되었다. 이승훈이라는 이 사람은 중국의 수도에서 낯선 신학문을 배우고 익혀 올 참이었다. 그는 알렉산델 드 구베아 주교에게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1784년에 귀국하여, 일군의 열심한 남자들과 함께 조선 그리스도 공동체의 초석이 되었다. 1785년, 그나마 몇 명 안 되는 그리스도인 가운데 김도마라는 사람이 단말마의 고문을 당했다. 본때를 보여 주면 스스로 배교하거나, 적어도 다른 이들에게 위협은 될 터였다. 그는 유배 중에 고문 후유증으로 조선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이어서 엄격한 반그리스도교 문서가 유포되었다. 누구나, 특히 그리스도인의 친지들은 그리스도인과 의절해야 했다. 어느 것도 신앙 운동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유례없는 방식으로 자생했고 유례없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종교 지도자가 필요했다. 사제가 필요했던 것이다. 미사 성제는 사제가 올려야 한다고 교리서에도 쓰여 있다. 베이징에서의 기억을 되살려 이승훈 베드로가 스스로 팔을 걷고 나섰다. 베이징 체류 당시 뇌리에 새겨 두었던 모범에 따라, 그는 주교와 신부를 비롯한 각종 교회 직무와 제도를 마련했다. 그들 가운데서 주교와 신부가 선출되어 설교를 하고, 미사를 집전하고, 견진을 비롯한 칠성사를 베풀기 시작했다. 물론 그리해서는 안 될 일이었지만, 그런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이태 동안 열정적으로 직무를 수행했다. 그러다가 교리서에서 읽은 내용들이 조금씩 떠올랐다. 베이징의 주교가 확답을 주기 전까지, 그들은 모든 직책을 단호히 포기하고 더는 직무를 수행하지 않았다. 베이징 주교의 답신을 받으니 유효하게 서품된 사제가 더욱 절실했다. 그들은 사제를 보내 달라고 간곡히 청했다. 작고 미약하게 출발한 조선의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4천 명으로 불어나자, 1791년 잔불 속에 숨어 있던 증오의 불씨에서 돌연 첫 번째 박해의 불길이 번지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죽었다. 사제도 없이 시낭응ㄹ 다져 온 이 가련한 사람들이, 친지들의 눈물과 탄식으로 마음이 약해졌다 한들 그게 어디 놀랄 일이겠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이 영웅들은 조선으 ㅣ야만적 관례에 흔히 있는 고문의 공포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고, 그 믿음 하나로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였다. 망나니 중 일부는 사형에서 종신형으로 감현된 범법자들이었는데, 그자들까지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힐 별별 고통의 수단들을 다 고안해 냈다. 1974년, 중국인 주 신부가 갖은 고생 끝에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무사히 조선에 잠입했다. 그의 등장으로 조선 교회는 급속히 성장했다. 몇 년 후에는 이 성인 같은 사제 주위에 만 명의 그리스도인이 모여들었다. 원수들도 손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1801/1802년의 박해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박해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양 떼들을 열성적 목자에게서 떼어 놓았고, 향후 30년 동안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사제 없는 고아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이 박해야말로 고결하고 영웅적인 사연들로 충만했다. 사연 하나하나가 초기 로마 교회의 순교를 방불케 했다. 박해는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사태를 발전시켰다. 박해자의 잔혹성과 스리스도인의 강인한 용기는 지방에까지 전해져 뜻이 고결한 지방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는 그 어느 지방보다 강원도와 경상도에서 측히 더 활발히 전파되었다. 

 

이러한 조선의 천주교 전파 역사를 보면 참으로 느끼는 점이 많다. 내가 이 당시에 태어났으면 과연 신앙을 지킬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고문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 온전히 내 자신을 완전히 비어내고 주님만을 믿고 따를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쉽게 대답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이들이 참으로 대단하게 느껴진다. 과연 나는 어떤 신앙인으로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정말 많이 고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