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천주교

왕비의 능과 러시아 정교

오후 산책지를 왕비의 능으로 정했다. 친러 정책을 펴다가 1895년에 시해된 왕비의 능이다. 혼돈의 시대였다. 1894년/95년 일본은 청일전쟁을 통해 한국을 중국의 손아귀에서 해방시켰으나, 이는 한국을 집어삼키기 위한 의도적 방책이었을 뿐이다.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자유를 얻은 한국은 국가의 위상이 정점에 이르렀다고 믿었다. 한국은 황제국이 되었고 해방자를 환호했다. 그러나 이들은 철군하지 않았다.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될 대, 러시아도 일본과 대륙에서 국경을 맞댄다는것이 얼마나 불쾌한 노릇일지 감지했다. 당시 사람들은 대체로 이 계획의 성공을 점치고 있었다. 뮈텔 주교가 러시아 공사에게 물었다. "러시아가 한국의 주인이 되면 가톨릭 선교 활동에 어떤 정책을 취하려 합니까?"공사가 대답했다. "우리는 반도 내의 선교사들을 서서히 말살시킬 것입니다. 새 선교사도 더는 못 옵니다." 러시아 정교는 이미 대대적인 포교에 착수한 상태였다. 서울에만 다섯 명의 러시아 정교회 사제가 파견되어 있었다. 이들은 유리한 정치적 국면에 힘입어 많은 지지를 얻었다. 마을마다 러시아 기도서로 넘쳐 나고 민심은 러시아 정교로 기울어질 태세였다. 가톨릭 선교회로서는 겁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국을 중국이라는 용의 발톱에서 놓여나게 한 해방자에 대한 열광도, 새로운 사태를 냉정한 시각으로 보자 황급히 휘발하고 말았다. 일 년 후에는 러시아에 대한 신뢰도 무너져 내렸다. 정교회 신부들은 귀향했다. 기도서는 담뱃대를 닦는 데나 쓰였다. 물론 가톨릭 선교사들에 대한 편견도 도처에 남아 있었다. 정세의 주역으로 자처하는 일본이 수수방관할 리 없었다. 무엇보다 러시아 쪽으로 기우는 듯한 왕비를 제거해야 했다. 1895년 10월 8일, 60여 명의 자객들이 궁궐을 범하여 왕비를 시해하고 시신을 밖으로 끌어내 멍석과 옷가지를 덮은 후 불을 질렀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자객들이 은밀히 잠입하여 일을 지른 후 탈출할 수 있도록 일본군 수비대가 사전에 적절히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운명은 한국을 러시아에 떠넘기려는 듯했다. 왕은 궁녀로 변장하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후 거기서 11개월 동안 국사를 돌보았다. 오직 외국 사신을 접견할 때만 궁궐로 돌아왔다. 이 첨예한 긴장은 8년 후에야 러일전쟁으로 해소되었다. 그것은 러시아가 가장 원치 않았던 결말이었다. 경쟁자를 한국 땅에서 영원히 축출함으로써, 일본에게는 드라마의 종장을 서둘러 끝내 버릴 길이 열린 것이다. 그것은 바로 고종 황제의 폐위와 한일병합이었다. 러시아의 승리가 가톨릭 선교회에 호의를 기약하지 않았지만 프랑스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러시아의 무운을 기원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방인 사제들은 일본이 이기면 더 많은 종교적 자유를 누릴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은근히 일본의 승리를 빌었다. 두 경우 모두 인종의식도 그들의 진심 어린 소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아시아의 강국이 유럽의 강국을 이기고, 그와 더불어 승리자 일본의 오만함이 하늘을 찌를 때 동양에서 유럽인의 체면이 곤두박질친 것은 섭섭한 일이지만, 선교와 문화를 생각하면 이런 결과가 전혀 애석하지 않다. 어쨌든 일본은 지난 수년간 보여 주었듯이, 비상한 각오와 역량으로 한국의 문화적 과제들을 해결해 나갈 것이다. 러시아의 의도와 능력과는 차별화될 것이다. 순교자의 피가 스민 이 영광된 나라가 하마터면 러시아의 가톨릭 박해 때문에 종교적으로 황폐해질 뻔 했다. 이것이 '왕비의 능'으로 가는 내내 들었던 생각이다. 왕비는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여인 가운데 한 명이었다. 분명 조국을 사랑했고, 집요한 일본인보다는 러시아인이 다루기 더 쉬울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꽤 먼 거리다. 언덕에서 다음 전차 정거장까지 족히 20분은 걸어야 한다. 좌우로 작은 집들이 보인다. 아래로는 작고, 어둡고, 허름한 지붕의 가게들도 늘어서 있다. 상품은 길 쪽에서만 볼 수 있다. 몇 전에 살 수 있는 것들이다. 식료품이 대부분이지만, 글씨 쓰는 작은 붓, 값싼 도자기, 짚신, 나막신 등도 판다. 비슷한 굽이 있다는 것만 배면, 한국 나막신은 일본 나막신과 판이하다. 일본 나막신은 두 개의 굽을 나무 밑창에 덧대지만, 한국 나막신은 통나무를 깎아 만든다. 섬 원주민들이 나무 둥치를 파서 뭔가를 만드는 것과 유사하다. 나막신이 발 전체를 감싼다. 이 둔한 신을 처음 신으면 몸이 앞뒤로 기우뚱거려 몹시 위태롭다. 그러나 한국인의 몸놀림은 나막신을 신고도 안정적일뿐더러 우아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아이들은 이 신을 신고 한 발로 팔짝 팔짝 뛰면서 땅바닥에  그린 동그라미 안에 돌을 던져 넣는 놀이까지 즐긴다. 이 괴상한 나막신과 달리, 여자와 아이들의 신은 색감이 곱고 모양새가 우아하며 문양도 단순하고 아름답다. 짚신은 통상 마른 날 많이 신는데, 며칠 후에는 내게도 필수품이 되었다. 짚신은 가볍고 편해서 도보 여행에 좋고, 자갈 투성이의 험한 산길에도 제격이다. 산행이 가볍고 잘 미끄러지지도 않는다. 어느 집 앞에서는 장기판이 한창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흥미롭게 사진 찍는 것을 즐기면서도 장기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한국인들은 장기를 좋아한다. 움직임이 빠르고 정열적이다. 장기에는 체스의 말보다 더 멀리서 더 자유롭게 공격하는 코끼리가 있다. 그래서 체스보다 더 어렵다. 전차가 동대문을 지나 도시를 벗어났다. 거리는 집과 상점과 사람들로 한참을 더 복닥거렸다. 드디어 교외로 나왔다. 한쪽으로는 논이 펼쳐지고, 다른 쪽으로는 왕릉 보호림이 조성되어 있었다. 넓은 길에서 꺾어 숲으로 30분 가량 들어가니 문득 왕비의 능이었다. 외로이 서있는 집 한채와 몇몇 아이들이 숲길의 분위기를 바꿔 주었다. 아이들은 땔감으로 쓸 풀과 나뭇가지를 특이한 갈퀴로 긁어모으고 있었다. 고즈넉한 숲 속에 공터가 있고, 그 뒤로 숲 가장자리에 언덕이 기대 섰다. 공터는 아직 나무 사이로만 보인다. 우리는 벌써 묘역 입구에 다다랐다. 길 좌우에 기둥을 높이 세우고 그 위를 가로질러 들보로 이어 놓은 일종의 문이다. 이 들보에 화살 모양의 나무 막대들을 수직으로 꽂아 왕실의 위엄을 드러내고 참배객의 경외심을 자아낸다. 이 기둥 문 사이로 재실이 보인다. 단청 장식의 나무 기둥과 하단부를 반원형으로 마감한 박공판이 검고 무거운 기와지붕을 받치고 있다. 용마루와 추녀 마루에는 토기로 만든 잡상들이 올라탔다. 재실 좌우로는 들보 구조물의 조각과 채색을 비슷한 양식으로 처리한 작은 집 두 채가 있다. 이 집들은 각목 울타리로만 둘러싸여 있어서 그 사이로 비석이 보인다. 검은 화강암 비석 앞면에는 왕비 민씨의 이름만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왕비의 생애가 작은 글씨로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안에 비석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재실 바로 뒤에 솟은 것이 능이다. 약 10미터 높이의 구릉에 지름 약 10미터의 평지를 조성하여 그 한복판에 능을 꾸몄다. 봉분은 지면 위로 높이 돋우고 잔디로 덮였다. 묘혈은 그 아래 있었다 능의 배후를 반원형 담장으로 둘러쳐 봉분을 보호했는데, 봉분과 담장 사이의 공간은 사자나 양 같은 큼지막한 화강암 동물 상을 세워 두기에 충분했다. 동물 상의 머리는 담장 쪽으로 향해 있었다. 이 동물들은 명부에서 안식하는 왕비의 수호자로, 힘과 권력을 상징한다. 봉분 하단에는 석조 흉벽을 둘렀다. 트인 전면에는 육중한 제단을 놓아 어둡고 깊은 묘혈 입구를 보호했다. 제단 앞 잔디 위에는 석등들이 조화롭고 질서 있게 배열되어 있다. 담장이 끝나는 지점과 연하여, 투박한 동물 상 사이에 기골이 장대한 시종무관 상 두 기가 보였다. 동물들은 머리를 봉문 쪽으로 두었다. 무거운 제복 차림의석조 시종무관들은 왕비의 공덕이 기록되어 있을 법한 두루마리를 들고 있었다. 손아귀가 억세 보였다. 능은 적막했다. 이 음울한 장소 위로 나뭇가지들이 장중한 침묵 속에 드리우고, 초록의 벽이 되어 뭇사람의 아우성을 방파제처럼 든든히 막아 주었다. 노을빛 불타는 먼 산봉우리만 이곳을 굽어보며 무덤 속에 잠든 왕비의 권력을 지켜 주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공기가 여느 무덤과 달랐다. 공기는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 능의 안식을 방해할까 두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