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천주교

거룩한 권위로 맞서는 사람

신약서만 보아도 스무 가지 종류 이상의 돈 이야기가 나온다. 로마제국에는 아주 여러가지 동전이 있었다. 왜냐하면 태수들과 시 당국에 일부 동전 주조 권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을 놓고도 요셉 플라비우스가 어디엔가 기록했듯이 대사제들은 크게 재미를 보았다. 성전의 금전 관리에는 결국 온 세상에서 모아들이는 거액의 성전 세금도 귀속했다. 이 돈에 대한 책임 역시 대사제에게 있었다. 그런고로 성전 재화 관리 주임은 탈무드의 어느 인용에서 말하듯이, 언제나 대사제의 친척이었다. 성전 재화 자체도 또 하나의 중요 사항이었다. 바로 성전 전체가 로마 황제의 보호하에 놓여 있었고 비유다인이 그 성역에 들어가기만 해도 사형에 처한다는 금령이 있었으며 니카노르문 앞에 있는 재화 창고 내의 성전 보물의 범접도 엄금했었다. 그래서 성전 보고에는 봉헌물뿐 아니라 거액의 돈도 들어 있었다. 고위층 나라들은 은행 업무에도 능통했다. 서기 70년에 티투스 장군의 뜻을 거미녀서 병사들이 성전을 약탈했더니 호아금이 얼마나 많이 쏟아져 나왔던지 그 시세가 반값으로 폭락했다. 끝으로 대사제들은 예루살렘에서 경찰력을 행사했다. 이를 위해 성전 경비대의 우두머리로 로슈하-카도슈 즉 성전 사령관을 두었다. 그 또한 언제나 대사제의 친척이었으며 때로는 대사제직의 후보자였다. 성도 전체에 대한 공권력은 로마인들이 부여한 것이었는데 최고의회의 권한 때문에 때로는 예루살렘 영역 너머까지 미치기도 하였다. 이렇듯, 앞서 말한 네 가문 등 예루살렘의 상류사회가 대사제직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일 만한 여러 까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직책이 종교적으로는 이미 속이 비어 있었고 현역들은 종교적으로 자유주의적인 사두가이파에 속해 있었다. 이들은 모세오경만을 인정하면서 그밖에는 권력과 금력의 인맥으로 일을 했다. 나자렛 예수는 그들이 누리고 있는 특권 지위에 위협을 주는 인물로 보았다. 그런 소견은 특히 예수가 성전에서 장사꾼을 내쫓는 사건으로 더욱 뚜렷해졌다 .여기서 예수는 그들의 큰 사업 이권을 걸고 그들의 신경을 몹시 건드렸다. 변을 당한 장사꾼들은 틀림없이 대사제들에게 가서 불평을 터뜨렸다. 예수의 개입은 매우 거칠어서 온유한 그세주상과는 사뭇 멀었다. 그리고 예수는 단순히 한 사회혁명가도 아니고 그 당시 가끔 등장하는 성전 비난가도 아니었다. 그는 구약의 예언자들의 비판적 사명과 꼭 맞는 성서 말씀에 따라 행동했던 것이다. 네 복음사가 모두가 이 사건을 보고하고 있는데 요한이 가장 상세하다. 예수가 이 도발적 행동을 벌인 것은 단지 착취에 대한 항의로서만이 아니다. 당시 그런 항의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곤 하였다. 꿈란 집단처럼 성전 예배와는 절연한 유다인 집단들도 있었다. 그것은 아니다. 예수는 의식적으로 예언자들과 메시아적 완성을 암시하며 행동하였던 것이다. 도둑의 소굴이라는 표현은 예레미야서 7장에 나온다. 건성으로 해도 소용없다는 말도 이어진다.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라고 건성으로 자꾸 되풀이해 봐야 아무 소용 없다. 하느님의 집은 신앙심으로 차고 넘쳐야 한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 하는 대목을 예수는 이사야서 56장에서 취한다. 그리고 즈카르야서 14장 21절에서는 종말에 있을 성전에 대한 이런 말씀이 나온다. 그날에는 만군의 주님의 집안에 더 이상 장사꾼들이 없을 것이다. 이처럼 성전 상인 소탕을 통해 예수는 명백히 메시아적 완성자로서의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기득권층은 경계를 하는 것이다. 이는 심연으로부터의 위험을 뜻한다. 성전 상인을 쫓아내면서 예수의 위력이 번쩍 엿보였다. 파견된 경찰력은 빈손으로 되돌아왔다, 아무도 이 사람같이 가르친 분을 본 적이 없어서 이어지는 논쟁에서 예수의 이런 주권자로서의 말씀이 떨어진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이 논쟁은 대사제들의 마음에 사무쳤다. 그들은 예수를 고발하는 재판정에서 바로 이 말씀을 꺼내 든다. 돈과 힘과 종교적 허울과의 충돌은 시대를 넘어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교회 역사의 불행한 시기에는 재력과 정치적 권력 전횡과 영신적 타락과 신학적 미숙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과연 어떠했던가. 그럴 때면 등불이 제자리에서 내려왔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는 예언자적인 인물들이 있어 약자의 수탈에 항거하며 투쟁하고 있다. 크로이틀러 주교, 아른스 추기경, 돔 헬더 카마라 등 남미의 헌신적인 빈민사목자들이 그런분들이다. 이들은 막강한 기득권층의 사계에 들었는데 비단 세속 족에서뿐 아니라 때로는 교회 안으로부터도 표적이 되었다. 교회 안에서마저도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결국 시혜적 자선으로 축소해 버리려는 기도가 있으며 거금을 모아 부유한 나라 은행에 은닉하는 남미의 기득권층과 곧잘 어울리는 부류도 있다. 그렇게 된 이상 산꼭대기에 거대한 그리스도상을 세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구약의 예언직 전통을 이어 나간다면 하느님을 섬기는 일과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힘쓰는 일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이상 교회는 불의와 수탈에 대항하는 구원자로서의 주님의 역할을 떠맡도록 늘 힘써야 한다. 교회가 그것을 안 하면 그 도덕적 신망을 곧 잃게 된다. 그저 몇 가지 전통적 신심 행사에 머물면 된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예수는 기득권층에 대한 항거의 값을 목숨으로 치렀다. 온 세상이 공익과는 전혀 무관한 투기 자본주의의 위협을 받고 있는 오늘, 교회는 스스로 설 자리가 어디인지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도 이 무자비하고 반사회적인 부자들이 한심하게도 하느님이라는 말을 입에 담으면서 도박장이 되어 버린 이 세상에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부관심으로 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나스 일가는 왜 이 사람을 없애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최고의회 앞에서 열린 재판에서, 신성한 것을 탐욕과 권력욕으로 악용하는 것에 거룩한 권위로 맞서는 이 사람은 죽어야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