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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예수와 대사제들

예수의 고난을 극기 수덕하는 영성적 입장이 아닌, 다소 다른 길로 한번 천착해 본다는 것은 지엽적인 데로 일탈하는 일이 아니다. 예수가 겪은 숱한 논쟁과 대립은 결국 그를 유죄판결로 말아갔거니와 모든 시대를 넘는 구원사적인 핵심을 담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를 당시의 역사적 배경에서 바라보고 이해하려고 힘쓴다면 하느님의 아들이 또한 인간이자 현존자로서 더 가까이 다가온다. 그런 뜻에서 이제 예수의 적대자들에게 눈을 돌려 보기로 한다. 나는 예루살렘의 큰 박물관에서 갑자기 대사제 카야파의 골호와 마주치면서 매우 놀란 적이 있다. 그것이 발견되었다는 것을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 적힌 묘지는 분명하였다. 유다교 분야에서 대사제들에 관한 문헌을 한번 보았는데, 한 독실한 랍비가 예수 시대의 대사제 명문가 넷에 관한 불쾌한 추억을 적은 글을 옮겨 실은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를 당시의 역사적 배경에서 바라보고 이해하려고 힘쓴다면 하느님의 아들이 또한 인간이자 현존자로서 더 가까이 다가온다. 그런 뜻에서 이제 예수의 적대자들에게 눈을 돌려 보기로 한다. 나는 예루살렘의 큰 박물관에서 갑자기 대사제 카야파의 골호와 마주치면서 매우 놀란 적이 있다. 그것이 발견되었다는 것을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 적힌 묘지는 분명하였다. 유다교 분야에서 대사제들에 관한 문헌을 한번 보았는데, 한 독실한 랍비가 예수 시대의 대사제 명문가 넷에 관한 불쾌한 추억을 적은 글을 옮겨 실은 것이었다. 이것은 예수 시대의 타락한 대사제직을 엿보게 하는 유다계 문헌의 한 묘사이다. 동시에 예수의 적대자 중에서도 가장 두려운 존재로 본 유력자의 이름이 이미 나타나 있다. 한나스가 바로 그다. 위에 거명된 가문들은 예루살렘의 부유층을 대표한다. 이들 가문의 한 궁궐을 성전 서쪽에서 발굴하였는데, 백성 대부분은 가난한 마당에 엄청난 재산의 흔적을 만났다. 이 네 가문은 예수 시대에 대사제직을 번갈아 맡았다. 그 직책은 사실상 로마 지방 태수들로부터 매수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로마 고위 관료들이 탐내는 수입원의 하나였다. 오늘 우리로 치면 억만금이 오갔다. 그래도 이 가문들은 그것을 뇌물로 제공할 줄 알았다. 왜 그랬을까. 따지고 보면 하나의 종교적 직책인데, 우리나라의 대부호들이 주교직 같은 자리를 놓고 거액을 내놓는다는 것은 도무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대사제직은 결코 전례적인 직책만은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훨씬 더 큰것이, 막강한 권력이 걸려 있었다. 그렇기에 한나스 또는 카야파 같은 자들은 돈이 있었기에 말하자면 금권 정치가였기에 대사제였던 것이다. 그리고 일단 그 직책을 맡게 되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권력을 돈으로 만들 줄 알았다. 말하자면 정치 금권가가 되었다. 대사제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1. 대사제는 유다 민족의 최고 대표였다. 큰 축일이면 그는 성의를 입고 가슴에는 열두 개의 보석이 박힌 흉배를 하고 주교판 비슷한 모자를 쓰고 성전에 들어갔다. 수석사제만이 지성소의 텅 빈 안에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성의는 로마 지방 태수가 간직하고 있다가 거룩한 축제날 내어 줌으로써 사제들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2. 대사제는 최고의회의 수석이었다. 최고의회는 로마인들 측에서도 인정하는 최고 종교 정치 사법 기관이었다. 의원은 71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의결 정족수는 그 절반이었다. 이 점은 수난사와도 상관이 있다. 카야파가 성목요일 저녁에 급히 연 회의에는 틀림없이 믿을 만한 의원들만 소집했을 것이다.이들을 파벌로 갈라 본다면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이었다. 이 두 집단은 종교적인 동기로 대립하고 있었다. 이들 중 아리마태아의 요셉 같은 원로들 역시 부유층에 속했다. 유다교계에서 다른 죄과를 다루는 법정은 3심까지 따로 있었으나 신성모독에 관한 판결만은 최고의회에 유보되어 있었다. 최고의회는 성지 밖에 사는 이산 공동체들마저도 자원하여 인정하였다. 3. 이처럼 대사제는 최고 법정의 법원장이었으나 사형 판결은 스스로 내릴 수 없었다. 그것만은 로마인들이 자신에게 유보하였었다. 이 규정이 스테파노의 투석 사형에서처럼 어쩌다 지켜지지 않은 경우는 아마 지방 태수의 자리가 교체로 인한 공석이었으리라고 짐작된다. 4. 대사제는 성전 관리의 최고직에 있었다. 그러니까 수천 명 사제들의 수장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의 중대한 경제 원동력이었고 헤로데 대왕 통치 이래 쉴 새 없이 거대한 건설 현장이었다. 5. 그러다보니 대사제는 성전 시장을 지배하는 자였다. 넓디넓은 이교도 앞뜰이라는 곳에서는 대규모 시장 영업이 번창하였다. 예수 재판 20년 후에도 한나스 아들들의 상점들이라는 말이 나온다. 상인들 하나하나가 물론 점포세를 내고 있었음은 상상이 간다. 여기서도 대사제의 물질적인 측면이 드러난다. 성전 시장의 가격은 대사제들이 매겼다. 그것도 어찌나 뻔뻔스럽게 높게 매겼던지 상인들이 들고 일어나기까지 하였다. 그중에서도 가난한 이들의 제물인 비둘기 두마리 값을 금화 1량으로 정하자 분노가 터졌다. 그리스도 약 20년 이후에 힘겨운 대결 끝에 시메온 벤 가말리엘이라는 랍비가 그 비둘기 한 쌍 값을 4분의 1데나르로 깎아 내리는 데 성공했다. 그는 저 유명한 랍비 가말리엘의 아들이다. 또 하나의 거침없는 모리 수단의 단계는 예루살렘 성전을 고유한 통화 영역으로 만든 사실이었다. 따라서 방문객과 순례자의 온갖 통화는 성전 은화로 환전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