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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하느님 아드님의 부활로써 우주와 역사를 향한 큰 플러스

인간은 거듭거듭 이 커다란 괄호 앞에 서게 된다. 사상가와 시인, 작곡가와 과학자, 연구원과 교사, 아이들 걱정을 하는 부모들, 평범한 보통 사람 누구나 이 커다란 괄호의 신비를 느낀다. 그리고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부담을 안고 있는 삶에서는 이 큰 괄호 앞에서 하나의 마이너스 표를 긋고 싶어진다. 우리들의 문명 세계에서는 특히 부유한 복지사회에서는 일종의 부정적 정서랄까 마이너스를 적어 놓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뺄셈에 나선 책, 연극, 카바레, 영화, 철학 등은 얼마든지 있다. 나이 들어 하는 노년 자살을 살펴보면 그 원인이 부정적인 인생 결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앞에 놓인 부호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부활은 무엇을 뜻하는가. 예수의 부활로써, 세계사의 가장 결정적인 아침에, 절대자는 저 초연하고 부드러운 손으로 마이너스를 하나의 플러스로 변화시킨 것이다. 우리 실존의 크나큰 괄호는 비극으로, 절망으로, 파멸로 끝나지 않는다. 누구든 선의와 신뢰심과 신앙심을 가지고 부활한 분의 빛의 둘레에 들어서면 곧 위로 들어 올려진다. 인생이 더 이상 입을 벌린 무로 빠져드는 비극일 수는없다. 아래로 내리그은 작은 마이너스가 수학 등식에 있어 그토록 중요한 플러스가 되면서 하느님의 산수에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우리의 존재는 마치 회오리바람이 낙엽과 가지를 위로 쓸어 올리듯이 위로 들어 올려진다. 그러면 큰 등식이 이렇게 된다. 플러스, 괄호 열고 이어서 운명과 죄과, 어둠과 빛, 공로와 실패, 더듬는 신앙과 희미하게 밝아오는 희망, 괄호 닫고 나면 그것이 곧 구원된 인간이다. 여러 해 전 나는 산촌의 한 학교에서 한 학년 동안 아이들에게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베들레헴에서 시작하여 가르치며 치유하는 생활을 거쳐 적대와 비난을 받다가 수난, 십자가 그리고 부활과 승천에 이르는 이야기였다. 다 마치고 나서 나는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그 모든 이야기에서 무엇이 가장 좋더냐고. 그랬더니 한 작은 녀석이 일어서더니 반색하며 말하는 것이었다. 모든 게 다 잘 끝나는 게 좋았다고. 그것은 한 아이 입으로 예수님이 가져다준 큰 플러스를 표현한 것이었다. 부활을 맞으면서 우리도 그 점을 영혼에 다져 넣어야 한다. 우리들의 인간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을 겸손과 신뢰를 가지고 구원하시는 하느님께 열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잘 끝난다고. 그밖에도 산농사 짓는 집 아이의 반응은 또 다른 것을 가리킨다. 저 큰 플러스에 대한 갈망은 아이와 어른 모두의 영혼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파멸과 헤어날 길 없는 젊아으로 끝나는 이야기를 싫어한다. 피노키오는 태워 버리면 안 되고 마야라는 벌은 밟으면 안 되며 긴 양말 핍피는 물에 빠지면 안 되고 백설공주는 죽으면 안 된다. 이렇듯 존재의 커다란 플러스에 대한 일종의 다할 수 없는 갈망이 있는 것이다. 목마름이 어딘가 물이 있으리라는 것을 깨닫게 하듯이 부정과 무의미와 의혹의 검은 물이 범람하는 세상에서 모든 것이 잘 끝나리라는 궁극적인 긍정에 대한 이런 갈망이 있는 것이다. 이 갈망은 제 아무리 위대한 결과를 내는 과학도, 기술도, 연구하고 활동하는 지성도 채워 주지 못한다. 우리 실존의 등식에 임하는 저 큰 플러스를 가져다주는 것은 오직 하느님에 대한 믿음, 구원자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다. 하느님은 그 아드님의 부활로써 우주와 역사를 향해 종국적으로 저 큰 플러스를 그려 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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