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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부활의 부활 방정식

부활 불꽃이 이 탁한 물에서는 픽 꺼져 버릴 것 같았다. 부활한 분의 소식 전달은 본래 어려웠다. 하지만 몇몇 사람에게서는 불이 붙었다. 이들 역시 한 지친 문명의 상징인 아테네의 그 장터에서, 부활 밤의 빛을 받았던 것이다. 그때까지 이들은 가소로울 정도로 적은 소수였다. 그런데 그들 안에서 붙은 불은 아크로폴리스와 아레오파고스, 철학 유파와 밀교 신봉보다 오래갔다. 이들 유산은 정신사 전문가들의 연구 대상이다. 그러나 부활의 불은 여전히 온 세상에서 타고 있다. 세상을 바꾸어 놓는 그리스도의 광휘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은 틀림없이 하나의 크나큰 은총이다. 이 믿음은 과거에도 쉽지 않았고 앞으로도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렵고 혼란스러운 세상 한가운데서 오늘도 그대로 부활의 알렐루야를 마음을 다하여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이 노래 안에서는 절대적 미래가 공명한다. 그렇다. 어디서나 때로는 크게 작용하는 통계 숫자는 결코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아테네의 장터에서도 그렇지 않았다. 부활 불꽃이 널리 비치기 위해서는, 전례와 경건한 아름다움을 넘어, 하느님의 예측할 수 없는 은총 외에도 또 다른 무엇이 결정적이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암흑을 이기는 위대한 승리를 엿보게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음이다. 부활의 빛발을 성당에 앉아 있는 이웃 너머로 전할 줄 아는 신자들이 있음이다. 우리 시대에도 확실히 많은 이들이 다른 누구로부터 적은 빛이라도 기다리고 있다. 바로 아테네의 장터에서도 그랬고 모든 시대의 온갖 인간적 만남의 자리에서도 마찬가지다. 사회의 시린 저녁 바람에 또는 성당의 썰렁한 외품에 가물가물하던 부활 불빛이 두고두고 탐조등이나 조공등보다 오래갈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세계 역사가 인상적인 입증을 해주고 있다. 구원을 향해 가기 위해서는 항해도가 필요하다. 내가 이제 항해 방향의 예를 들자면, 라디오와 레이더 발명 이전까지는 항해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두 가지 있었다. 그 하나는 기적부표였고 다른 하나는 등대였다. 기적부표는 안개 속이다 어둔 밤에 높은 소리를 지르며 암초가 있음을 경고한다. 오늘날의 그리스도교에도 기적부표가 있다. 암초와 오류의 벼랑이나 죄악의 위험한 사주나 평평한 모래톱을 경고하며 외치는 개탄과 고발의 기능을 나무랄 마음은 없다. 하지만 기적부표도 그 합창이 너무 강렬해지면 듣기에 괴로워질 수가 있다. 빛을 빙빙 돌리면서 그 해상의 파도 위에 반사시키는 등대가 오히려 항해 방향을 잡아 주는 데 더 마음을 끄는 편이다. 부활 성야와 성토요일 거행의 기억을 간직하는 우리는 역시 때때로 예수 사건에 있으 그래도 기적부표가 아닌 등대 노릇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해서 부활하신 분의 소식 전달이 이 다차원적이고 혼란스러운 세상의 장터에서 덜 어려워지도록. 교회의 오래된 관행에 따르면 큰 축일, 특히 부활 주일에는 강론을 너무 길게 하지 말라고 했다. 나도 이를 따르고자 하는데 그것은 내 나름의 소신에서이다. 성급하고 어수선한 우리 이 시대에 귀담아듣는다는 것이 그리 간단치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안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서 현대 강론은 짧게 하라는 그 경고 또한 하나의 문제이다. 온 세상을 포괄하는 진실을 어떻게 짧게 피력하란 말인가. 부활 날의 신비의 폭넓은 효력을 어떻게 전보치듯 다 전하란 말인가. 시간과 영원을, 우주와 역사를, 현재와 미래를, 온 인류와 내 이 작은 인생을 다 감싸는 그 힘을 전보 치듯 할 수 있는 건 뉴스, 연락, 사업 소식, 정치 선전, 증시 분석 따위겠는데 그 경우라도 축약이 못마땅할 수 있다. 그러나 구원의 신비, 이 가련한 세상에 대한 무한자의 사랑 이야기를 어찌 손쉽게 짧은 속기록에 담아낼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제 나는 부활이 여러분에게 그리고 나 자신과 모든 이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몇 마디 문장으로 표현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나로서는 과히 익숙지 않은 그러나 가장 짧은 공식을 개발했다는 수학으로 대신해 볼까 한다. 학교에서 복잡한 등식을 앞에 놓고 착잡한 생각으로 앉아 있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그 많은 숫자와 글자들, 기지수와 미지수, a와 b와 x와 y, 게다가 작은 괄호를 가두어 넣은 큰 괄호들, 분수와 근수와 자승 등등. 통틀어 꽤나 부담스러운 추억이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어쨌든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괄호와 덧셈, 뺄셈 앞에 있는 부호가 결정적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다른 모든 것은 그 부호에 달려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내가 뜻하는 바를 걸고 들어가 보겠다. 어떨까. 우리들의 어렵고 불투명한 인간 실존을 단 하나의 커다란 괄호로 형용할 수 있찌 않을까. 그 괄호 안에 또다시 둥근 괄호 또는 각진 괄호가, 운명과 유전의 많은 기지수와 미지수가, 다 풀어낼 수 없고, 제 아무리 유식한 인류학도 산출해 내지 못하는 근수가, a와 b와 x와 y를 담은 많은 수수께끼와 불확실성 등이 있다. 죄과로 인한 잘 드러나지 않는 균열, 우리네 인간이 삶의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도 두제곱, 세제곱, 네제곱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생기는 과도한 공권력 행사도 있다. 우리의 이 커다란 괄호 안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 타고난 것과 습득한 것, 환경과 사회, 성취와 좌절, 성공과 실패, 고통과 사랑 숙명과 자업자득, 자유와 속박, 불안과 갈망, 밝은 길눈과 헛길, 선의와 낭패 위기와 발전, 삶과 죽음이 다 들어있다. 나의 인간 실존이라는 큰 괄호 안에 다 들어 있으며 그 괄호는 학교에서 나를 괴롭히던 저 등식들보다 훨씬 더 크고복잡하다. 우리의 커다란 운명 괄호를 푸는 일이 어쩌면 어린 중학생을 닮았다. 시간은 자꾸 흘러가고 초조하게 시계만 들여다보는데 휴식 신호가 울릴 때까지 끝마칠 것 같지는 않고, 우리들 역시 인생 괄호의 풀이를 하는 중에 시간은 빨리 흐르고 이 숙제를 다 해낼 수 없을 것만 같다. 잘 모르겠고 내다보이지도 않고 비극적인 현실 속으로 너무나 깊이 뻗어 있는 많은 뿌리를 뽑아 올릴 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