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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신앙의 부활 빛이 밝혀지기 어려운 오늘

하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그리스도는 강자에게는 강경하고 약자에게는 부드러웠다. 더 나아가 큰물로도 끌 수 없는 이 부활의 사랑 노래에는 또한 도움과 보살핌과 공감과 동참의 소절도 있다. 더 나아가 큰물로도 끌 수 없는 이 부활의 사랑 노래에는 또한 도움과 보살핌과 공감과 동참의 소절도 있다. 강물도 휩쓸어 가지 못하는 사랑의 이 소절을 선창 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언제나 하느님의 가락이고 이를 노래하는 곳이면 어디나 구원하시는 하느님이 멀리 계시지 않는다. 계시의 하느님은 당신 창조에 이 가락을, 여러 소절과 변주로, 때론 조용하게 때론 아주 강하게 작곡해 넣은 것이다. 그리고 내게는 이 가락을 한 장난꾸러기를 시켜 비밀경찰 감옥 안까지 들려주었다. 사랑은 죽음처럼 힘이 억센 것, 사랑의 화살은 불로 된 화살, 큰물도 사랑만은 끌 수가 없고 강물도 쓸어 가지 못하옵니다. 

성토요일 밤에는 불이 타고 있다. 부활 성야 전례는 저녁 하늘을 향해 솟은 수없는 성당 정문과 담 앞에서 진행된다. 이 독특한 빛의 축제는 틀림없이 더 아름다워졌고 마땅한 자리인 회중 한가운데로 옮겨졌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이 전례를 열심한 부인 두어 명과 집전 성직자 외 우리들 복사 몇 명과 끼리끼리 새벽 다섯 시에 따로 치렀다. 그러고 나서 이 낯설어진 전례의 일종의 민속적 대용으로 오후에 가서야 부활제를 거행했다. 하지만 그것으로서는 구원 축제의 심오한 뜻이 더는 살아나지 않았다. 게다가 성토요일 이른 새벽에 치르는 부활 밤 전례는 물론 라틴어로 행하였다.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번역이 적힌 소책자 하나를 챙겨 주어 그 뜻을 따라 할 수 있게 하였다. 뿐더러 부활초를 켜고 용약하라를 노래하고 첫 알렐루야를 환호하라는 등은 모두 참여자 없이 하였다. 이런 이야기를 내가 이번에 늘어놓는 까닭은, 예전에는 모든 것이 더 좋았다는 넋두리가 그치지 않아서이다. 부활성야 거행에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다. 오늘의 전례와 1930년대의 전례를 찍은 단편 기록영화를 보면 알 만하다. 후자는 전례의 석기시대로 돌아가 보는 나들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데에 있다. 부활의 불빛이 오늘날 보게 된 심미적인 전례 체험 너머, 촛불과 찬란한 조명 너머, 사람들의 마음속까지 풀리지 않은 죄책의 어두운 구석까지, 그늘져 가는 마음들까지 비추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그 불빛이 과연 생명 존중과 인간성의 증진으로 이어지는지 희망의 불꽃을 일으키는지 부활 불빛의 반사가 사회의 길거리에까지 비치는지 구원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기쁨이 솟게 하는지 몯게 된다. 이것이 문제이다. 예수 부활의 소식 전달은 항상 어려웠다. 부활하신분을 몸소 만난 제자들에게마저 어려웠다. 그 발현에 압도되고 기뻐 어쩔 줄 모르면서도 한동안 그들은 이를테면 노출 부족이었다. 더 깊이 깨닫는 데는 성령의 강림이 있어야 했다. 부활 불꽃의 소식 전달은 언제나 어려웠다. 그 당시 세상에서 바오로도 이 어려움을 어떻게 체험하였는지 사도행전 17장은 이야기해 준다. 이제 장면을 바꾸어 바오로와 함께 아테네의 시장터로 한번 걸어 들어가 보자. 아테네는 기술적 변화만 아니라면, 오늘의 우리 세계와 정말 닮았다. 그곳은 하나의 다양하고 다원적인 세상으로 로마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흘러 들어오는 고대와 동양의 조류가 뒤섞이는 곳이었다. 거기에는 철학의 여러 유파와 신비로운 밀교들, 학자들과 도사들, 사상가들과 말쟁이들, 진정한 구도자들과 비교적 환상가들, 호사가들, 선정적인 불가지론자들이 모두 오늘날처럼 모여 살았다. 옛 아테네는 지난날의 영화는 다 바랬으나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데모스테네스, 피타고라스와 같은 위대한 인물들의 덕을 보고 잇었다. 마치 오스트리아의 축제 계절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의 덕을 보듯이. 그러면서 자부심도 있었다. 세계도시답게 너그러운 마음, 때로는 다 안다는 식의 교양에 대한 자만이 젖어 오늘도 그렇듯이 문화 운운하고 있다. 이런 피상적이고 어지럽고 천박한 사회 한가운데에서도 역시 오늘도 그렇듯이 진지하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세상을 향해 부활의 불을 던진다. 이야기를 해 보라고 청을 받은 그는 그가 보기에 청중 쪽에서 긍정적이고 유망한 면을 들어 관심을 끌어 보려 한다. 그는 허다한 신전과 성지 중에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 바쳐진 제대를 하나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를 접점으로 삼아 보고자 하였다. 그리고 발을 들여놓는 데 거의 성공한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순박한 서민들은 고래의 다신 천국을 아직도 믿고 있었고 도시의 식자층은 그런 믿음에서 벌써부터 벗어나 있었다. 사람들이 타르소에서 왔다는 이 천막공에게 물론 무슨 큰 기대는 안 걸었다. "땅까마귀가 뭘 어쩌자는 건가" 하면서 사람들은 자기네의 풍부한 정신세계에서 그저 흘린 낟알이나 좀 주워 올 수 있었겠지 하였다. 그래도 어쨌뜬 무언가 막연하게 신적인 것에는 귀를 기울여 보자는 거였다. 그런데 바오로가 웬 부활 이야기를 시작하자 잘난 청중은 비쭉거리며 빈정댔다. "그런 이야길랑은 두었다가 다음에 들읍시다." 

 

나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유심히 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바오로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 지금에서야 성경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당연한 사실로 항상 접해왔기에 이를 당연한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이런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바오로의 말을 들었으면 과연 나는 어땠을까 상념에 빠지게 됩니다. 또한 내 눈앞에서 예수님이 살아오신다면 나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것인지도 고민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지금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예수님이 그저 책 속에만 존재하는 사람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 안에 항상 함께하시는 분이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이번 글을 적으며 저 역시 제 자신을 많이 돌아보았던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