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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부활을 알리는 가락

"나는 당신 이름을 겨레에게 전하고 그 모임 한가운데서 주를 찬미하오리니 가난한 이를 배부르게 먹이리이다. 야훼를 찾는 사람들이 당신을 기리며, 세상의 모든 권세가들이 그분께 경배하고 나의 영혼은 주님을 위하여 살리라. 나의 후예는 당신을 섬기며 미래의 세대에게 주를 들어 말하오리라. "

앞에서 성금요일에 번갯빛이 비친다고 말한 대로 낭패로 보이던 그날이 실제로는 이미 부활의 조짐으로 차 있다. 시편 22를 다 읽으면 그분께서 다 이루셨다.라는 끝마디로 맺는다. 요한복음서 19장 30절에 나오는 예수의 마지막 말씀은 다 이루었다가 아닌가. 예수가 이 예언적인 시편의 첫마디와 끝마디를 기도함으로써 이 시편에 담긴 내용 전부가 바로 이 자리에서 지금 실현되고 있음을 밝혔다는 점을 거의 아무도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이 나로서는 언제나 의아하였다. 이 시편이 말하는 모든 것이 바로 지금 여기에 해당하며 바로 지금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주석학자 한 사람은 내게 말하기를 이 시편과 같은 대목이 나오는 것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에 있던 비교적 많은 바리사이들과 사제들을 위해서였다고 자기는 믿는다고 하였다. 그 후에, 부활하신 분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성서를 풀이해 주었는데 거기에도 시편 22가 들어 있었을 것이다. 이상이 하느님에게 버림받아 죽어 가는 예수의 힘겨운 절규의 다른 면이다. 이 시편 안에 성금요일의 모든 참상과 아울러 내일의 확실한 승리가 함께 나타난다. 그렇기에 예수의 적대자들에게는 하나의 엄청난 경악이었다. 그들은 골고타에서 승리감에 들뜨기는커녕 불안하고 심란한 상태로 집으로 돌아갔다. 처형된 이 사람의 사안이 종결되지 않고 일견 승자로 보이던 그들을 숨 막히는 예감으로 억누른다. 그리고 그들의 예감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앞서 보았듯이 예수는 한편으로는 영적인 고통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인간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경이로운 품위와 주권을, 신적인 존엄과 영예를 주장하였다. 이렇듯 부활의 빛은 치유와 행동, 말씀과 가르침을 통해서만 비칠 뿐 아니라 극도의 무방비 상태와 죽음의 단말마를 통해서도 비치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부활 아침을 맞는다. 이 아침은 결정적인 돌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드러난 승리가 결정적인 확인이며, 하느님이 그 안에서 우리들을 향해 자신을 보여 주신 계시이다. 부활을 두고 우리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늘이 바이올린으로 가득하다"는 금언을 감히 쓸 수 있다. 온 땅과 우주에 노랫소리가 울린다. 우리는 절대자가 그의 창조에서 대로는 뚜렷이 또 때로는 우리 인간 위에 불가사의한, 거의 아픈 불협화음으로 들려주는 가락의 주도악구를 알아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 가락은 어김없이 베토벤의 9번 교향곡처럼 빛나는 종악장으로 끝맺는다. 중세의 위대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 주도악구에 귀를 기울였고 하느님 가락의 기조는 단 한 가지, 곧 사랑밖에 있을수 없다고 밝혔다. 나도 한번은 이 경이로운 가락을 어느 순간 들은 적이 있다. 그때는 하늘이 바이올린으로 가득하지 않았다. 나는 열아홉 살 나이에 게슈타포에 잡혀 독방에 감금되어 있었는데, 그다음 날이면 강제수용소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순례 조직에 협조했다는 고발이었다. 강제수용소가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꿈도 못 꾸었다. 그렇게 날은 저물었다. 경찰서 유치장의 조그마한 창을 통해 도시 위에 솟아 있는 노르트겟터의 한 귀퉁이를 마치 자유의 마지막 인사처럼 바라보았다. 유치장 앞에는 상수리나무 몇 그루가 있었는데 우리 소년 그룹의 장난꾸러기 한 명이, 우리가 위층에 수감되어 있는 걸 알고, 나무에 기어 올라가 친위대원들이 알 턱이 없는 가락을 휘파람으로 불어 주었다. 그것은 그 무렵 처음으로 전례에 도입된 아가 곡의 한 자락이었다. 사랑은 죽음처럼 힘이 억센 것. 사랑의 화살은 불로 된 화살, 큰물도 사랑만은 끌 수가 없고 강물도 쓸어 가지 못하옵니다.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를 계시하는 하느님, 구원의 찬가, 성삼위의 기조 악상, 시간 안에서 영원의 선율. 부활을 노래하는 그 악상에는 여러 절이 있다. 거기에는 우선 그럼에도 사랑이라는 절이 있다. 하느님은 혼란을 거슬러, 고난과 저항과 어둠의 뇌우 속에서도,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고자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이 고통과 죽음과 죄악을 왜 허용하는가 하는 신비에 접하게 된다. 그분은 사랑이 더 강하다는 것을 보이고 계시며 더욱 뚜렷이 보이실 것이다. 다음으로는 듣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자비의 절이 있다. 복음서는 이 소절을 거듭거듭 노래한다. 양을 찾으려 초원과 가시덤불을 헤매는 착한 목자의 모습에서,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나누는 대화에서도 당시 사회의 금기와 편견을 무릅쓰고 이 자비의 절이 들려온다. 이 자비의 절은 특히 간음한 여인과의 장면에서 아주 뚜렷해진다. 바리사이 시몬의 집 잔칫상 곁에서 벌어진 죄녀와의 감동적 만남에서는 이 소절이 연회 음악같이 들려온다. 자비의 이 가락은 심지어 십자가 처형장에서의 망치 소리조차도 누르지 못한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모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한 첫마디는 죄사함의 자비로운 말씀이었다. 나는 그리스도교를 일련의 그저 좋은 말로 변형시켜 버리려는 무리에 속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음을 벌써부터 느끼고 있다. 맞는 말이다. 나는 하느님의 압도적인 자비를 믿고 있으며 이것만이 내 삶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해 준다. 예수는 그의 사랑의 노래 중에 때로는 북 치며 나팔 불며 자비의 가락을 들려주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