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천주교

성금요일 밤을 비춘 번갯불

골고타에 드리우는 밤과 함께 우리는 구세사의 가장 깊은 어두움에 다다른다. 여기서는 외로운 십자가 형틀을 중심으로 증오와 선동, 잔학과 비정, 경악과 경직된 고통이 한데 엉겨 있다. 그 실상은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미화하며 애써 묘사해 놓은 모습보다는 사뭇 참혹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성금요일 묵상에서 그저 어두움의 숨 막히는 시간 안에 갇혀 있고 싶지는 않다. 유심히 바라보면 이 전율의 한밤에, 밝은 번개가 마치 이른 부활 번갯불처럼 번쩍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제 먹구름 속의 이 빛을 조금 따라가 보겠다. 이렇게 출발할 수도 있겠다. 저마다 서로 전혀 다른 동기로 나자렛 예수를 반대하는 무리는 네 패가 있었는데, 이들이 사악하게 작당하여 예수의 낭패를 재촉하였다. 첫째 집단은 역시 예루살렘의 고위층으로서 한나스 일가의 지휘하에 놓은 수석사제들과 더불어 상류사회에 속하는 사두가이 계열의 최고의회 의원들이다. 이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하는 존재로서 예수를 두려워했다. 이들은 백성들에게 평판이 나빴으며 유다계 문헌에서도 좋은 소리를 못 듣는다. 이들 세상에서 통하는 것은 돈과 권력과 성전 관리권 그리고 로마인들과의 적당한 협잡이었다. 예수 반대파 중 둘째 집단은 근본주의적 바리사이계 율법학자들이다. 이들은 형식주의와 자기네 위상에 대한 자만에 기울어 있었다. 첫 번째 집단과는 달리 유식했고, 거듭 유념할 점이지만 바리사이 신분에 속하는 만큼 진지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 집단이 예수와 날카롭게 대립한 까닭은 예수가 그들 마음의 경색과 도덕적 우월감, 외적 격식에 대한 집착, 서민에 대한 멸시 등을 지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나자렛 사람을 미워했다. 셋째 무리는 본시오 빌라도와 그의 병정들이다. 본시오는 원래 야당 출신이면서 원로원에 대항하다가 자신의 출세가 위태로워지자 결국 굴복하고 만 정치인이다. 그의 병정들은 벌써 여러 해째 유다인 의용대원들과 게릴라식 격전을 벌여 왔었다. 화해할 줄 모르는 그 강경 일변도는 불행히도 오늘날 성지에서 보는 바와 똑같았다. 이들 병정은 열성당원 또는 성전 혁명 당원을 상대함에 있어 자신을 무슨 검사로 알았고, 유다인 해방운동가들의 한 우두머리로 보는 예수를 마침내 자기들 손아귀에 넣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를 매질한 다음 가시관을 쓴 승전 장군으로 조롱하였던 것이다. 끝으로 네 번째 집단은 바로 해방운동가들이었다. 예수는 이들이 생각하는 그런 정치적 메시아이기를 줄곧 거절했다. 그래서 한때 예수를 임금으로 받들기를 원했던 그들은 그에게 실망하였다. 그들의 구세주상은 오히려 바라빠였다. 예수라는 나자렛 사람에게서는 그들이 종교적 정치적으로 꿈꾸던 신국은 전혀 기대할 수가 없었다. 제자들에게는 그들의 이런 사고가 낯설지 않았다. 사도들 가운데 하나는 열혈당원 시몬이라고 불렸다. 

예수는 서로 미워하는 이들 네 집단 모두에게 하나의 걸림돌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 밤에 죽어 가며 매달려 있다. 그러나 거기 번갯불이 비치고 있다. 첫 번째 번개는 예루살렘의 부유한 고위층의 한 사람을 친다. 하나의 영예로운 무덤을 예수에게 내어 주기로 한 결단이 아리마태아의 요셉에게 있어 어떠한 용단이었는지 우리로서는 전혀 헤아릴 수조차 없다. 십자가형에 처한 자들은 쓰레기 더미에 갖다 버리는게 통례였다.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그들은 신체적으로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끝장이었다. 최고의회원 아리마태아의 요셉은 이 행위로써 그 사회에서 더는 살아 나갈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번개가 그를 쳤던 것이다. 두 번째 번개는 바리사이 율법학자 니코데모를 친다. 그는 은밀하게 예수에게 동조하고 있었다. 예수의 죽음을 보자 그는 모든 조심을 떨쳐 버린다. (틀이 잡힌 지성인들은 흔히 소심한 데가 있다.) 그가 한번은 밤의 어둠을 타고 예수와 이야기를 나누러 온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 성금요일 밤에는 자기가 예수를 믿음을 고백한다. 대축제를 맞은 마당에 율법을 엄수하는 바리사이로서 시신을 상관한다는 건 대담한 일이다. 이로써 그는 전례상 부정 탄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니코데모는 이 시간에 모든 조심을 떨쳐 버린다. 번개가 그를 쳤기 때문에. 세 번째 은총의 빛발은 병정 중의 하나인 백인대장을 비춘다. 그는 벌써 수많은 처형을 지켜보았는데, 형벌의 고통을 겪는 자들은 마지막 숨이 끊어질 때까지 가해자들을 저주하게 마련이었다. 저주가 바로 최후의 마법적 무기였다. 그러나 백인대장은 이제껏 십자가형을 받는 사람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말을 듣자 그는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셨다 하였는데, 그의 배경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 사람은 범죄자가 아니야 라고 말하려고 했으리라. 이번에는 무자비한 전투와 살육으로 굳을 대로 굳은 로마 군인의 강철 갑옷을 섬광이 뚫은 것이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인 부활 번개는 네 번째 경우에서 빛난다. 이번 번갯빛은 그리스도 곁에 달려 있는 광신자, 로마의 압제에 맞서 온갖 수단을 다하여 마지막 숨까지 싸워 온 테러 집단의 한 사람을 스쳐 간다. 성서에서 그들을 다소 부당하게 강도라고 부르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세계사에서 거듭되는 꿈, 그러나 피와 비참으로 끝나고 마는 정치, 종교적인 꿈을 위하여 싸워 온 사나이다. 그런 그가 이제 말한다. 선생님, 당신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러면서 전혀 다른 메시아 왕국에 대한 희망이 비치기 시작한다. 이제 빗나간 폭력으로 물든 그의 인생 위에 골고타에서 가장 위안을 주는 말씀이 들려온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여기서야 말로 구세사의 가장 어두운 밤에 영원한 부활이 번쩍 비쳐 온다. 성금요일을 마냥 절망적인 암흑에 남겨 두지 않는것이 이 번개 빛발들이다. 번개는 모두를 비추고 지나간다. 예수를 거슬러 공모하던 자들, 상류사회의 부자, 숨 막히는 율법의 학자, 로마 군대의 장교, 종교, 정치적 광신자, 모두를 그러면서 주님은 성금요일의 번갯불들로 어떻게 앞으로 승리할 것인지, 아니 어떻게 우주적으로 승화할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것도 그의 제자들이 바랐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주님은 마음들을 움직여 승리하고자 한다. 십자가와 은총으로 승리하며 그 승리의 길은 영원한 영광으로 이끈다. 

 암흑의 시간에서 영원히 그칠 줄 모르는 이 메아리가 우리에게 울려 와야 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성금요일 밤은 암담하게 어둡지만은 않은 것이다. 죽음과 낭패만도 아니요, 증오와 악의의 승리만도 아니다. 십자가의 시간을 꿰뚫고 은총의 승리가 비춘다. 성금요일은 그 뒤에서 번개 빛발이 번쩍이는 뇌운일 따름이다. 

 

예전에 패션오브크라이스트라는 멜깁슨의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영화는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들을 고증에 충실하여 재연하였습니다. 너무나도 잔인한 고문 후, 골고타 언덕을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기존 세력의 입장에서 예수님은 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을 깨트리는 사람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의 개혁가였고, 본질에 충실하려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본시오빌라도, 백인 대장 모두 예수님이 무고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아가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무리 스스로 원하신 고난이라고는 하지만 너무나도 가혹했고 잔인했던 고난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