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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이 사람은 누구인가

사람 본연의 됨됨이를, 그 성품의 눈여겨볼 점들과 인격의 진면목을 언제 가장 잘 알아볼 수 있을가. 많은 경우, 짓누르는 압박을 받고 있어, 체통이나 소위 이미지, 무슨 칭호나 명성, 재력이나 인맥 등이 다 무의미해지고 떨어져 나가 이른바 사회적 지위 따위는 아주 소용이 없어졌을 때에 제대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참다운 친구는 역경에서 드러난다는 격언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극심한 곤경에 처해 있을 때에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위대함을 드러내는 사람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보게 되는가. 그런 상황에서는 전혀 짐작도 않던 드문 덕성이 드러나곤 하는데 공익을 위한 투신, 사생활과 건강마저 바친 삶, 몰아적 마음가짐, 좌절의 수용,  정신적 역량 등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본연을 알아보려 한다면 무엇보다도 고난 중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복음서의 큰 몫을 차지하는 성목요일과 성금요일에 일어난 일들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함과 그의 본연의 신비가 말하자면 그 꽃을 피웁니다. 고난사에는 예수의 운명을 결정짓는 두 번의 순간이 있습니다. 이 두번의 순간마다 거의 사형선고나 십자가형에서 그를 구해 낼 어떤 길이 트이는 듯하였습니다. 그때마다 진리와 율법이 예수 편에 있었습니다. 그 중 어떤 경우에도 묵비 또는 예수의 은근한 화법이 그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실제 품격에 관해 은밀하게만 말하였고, 치유를 하고도 소문을 내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였는가 하면 왜곡될 우려가 있는 메시아 칭호는 아예 피하였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한 두 번의 기회마다 예수는 전혀 자세를 하지 않고 자신의 품격을 밝혔습니다. 이 과감한 솔직성은 두 경우 모두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첫 번째 극적인 순간은 최고의회 앞에서의 재판 현장에서 벌어집니다. 우리는 그 과정에 관해 상세히는 모르지만 복음서들은 그 핵심을 짚고 있습니다. 카야파가 주재하는 최고의회 앞에서의 재판은 유다법에 따른 재판입니다. 여기서 피고의 죄상은 오로지 증인들의 진술이 일치하여야만 확인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네처럼 고발장을 읽고 나서 피고는 유죄를 인정하는가 하는 물음으로 재판을 열지 않습니다. 유다식 판사의 역량은 무고일 경우 증인들을 어떻게 심문해야 스스로 모순에 빠져 그들의 거짓이 드러나게 하느냐에 달려 있어 증인들이 꼭 필요했습니다. 증인들의 발언이 서로 어긋나 그 거짓이 드러난다면 피고는 석방되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구약서에 실린 목욕하는 수산나의 일화에서 그러한 재판 요령의 모범 사례를 봅니다. 젊은 다니엘은 그렇게 거짓 증인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립니다. 성목요일 늦은 저녁 최고의회의 갑작스러운 소집령으로 모여든 주역들은 몹시 시간에 쫓겼습니다. 예수 사건을 처결하자면 성금요일 초저녁 6시까지밖에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때부터는 여드레에 걸친 대축제가 시작되는데 재판 절차는 물론 처형까지는 생각도 못할일이었습니다. 대사제들은 그렇다고 예수를 장기간 구금하기는 두려워했습니다. 일은 서둘러 처리되어야만 했습니다. 게다가 또 빌라도의 동의도 얻어 내야 했습니다. 최고의회가 판결을 내리는 데에는 그 구성원의 일부만으로도 족했습니다. 예수와 동조하거나 강권 행사를 꺼리는 의원들에게는 틀림없이 소집령을 전하지 않아 니코데모 같은 이는 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증인도 두 사람씩 준비시켜야 하는 터에 부득이 몹시 서두르다 보니 재판 준비가 허술했던 듯합니다. 하기야 막강한 대사제들은 수하에 자기네 뜻대로 그런 증인 노릇을 거침없이 시킬 만한 자들을 얼마든지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는 그 증인 등장이라는 것이 빗나갔습니다. 여러 쌍의 증인이 차례로 등장했지만 그들이 예수를 거슬러 한 말들은 서로 맞지가 않았습니다. 복음서에 뚜렷이 언급된 마지막으로 나선 한 쌍의 증인도 성전 파괴 운운하며 예수를 고발했으나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렇게 되다 보니 재판은 극히 곤혹스러운 고비에 이릅니다. 증인들이 실패하면 유다인인 피고는 석방되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그 사람에게 권력을 줘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 역시 회사에서 직급을 가졌다는 이유로 돌변하고 갑질하는 사람들을 참 많이 보아왔습니다. 본인이 조금 더 많은 경험을 쌓아서 조금 더 많이 안다는 이유로, 아랫직급의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보고 저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실수에는 관대하고, 남의 실수는 가만히 두지 않는 이중적인 인간들을 보면서 기독교인으로서 저들을 어떻게 대해야하는지도 정말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세상은 악인으로 가득합니다. 이들을 신경쓰고 살기에는 제 인생이 너무 아까웠고 실제 이런 저의 생각은 맞았습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기에도 인생은 짧습니다. 이런 저의 생각이 기독교인으로서 인간관계에 대해 고민하시는 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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