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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예수님

성목요일 저녁은 실로 극적이었습니다. 어둠과 빛, 죽음의 예감과 형제적 유대, 배신과 성찬, 제자들의 좁은 도량과 온 세상을 품는 구세주의 사랑, 자리다툼과 위안의 언약. 그리고 이 만찬 끝에 올리브 동산으로 나가면서 찬미가를 부릅니다. 마르코는 이 점을 분명히 적었습니다. 대할렐이라고 하는 이 찬미가에 어떤 시편들이 담겨 있는지 이제는 알려져 있습니다. 이 찬미가는 과월절 양을 먹는 의식에 속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올리브 동산을 향해 걸으면서 부른 이 찬미가에는 시편 116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시편을 읽다 보면 그것은 마치 이날 밤에 일어날 일의 서곡같이 들립니다. 

 "죽음의 올가미가 나를 에우고 저승의 공포가 나를 덮쳐 나는 고난과 근심에 사로잡혔네. 이에 나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불렀네. 아, 주님 제 목숨을 살려 주소서... 내 영혼아, 주님께서 너에게 잘해 주셨으니 평온으로 돌아가라... 내가 모진 고난을 당하는구나 되뇌면서 나는 믿었네. 내가 질겁하여 말하였네.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 구원의 잔을 들고서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네.. 당신께 성실한 이들의 죽음이 주님의 눈에는 소중하네."

찬미가에서 주님이 읊은 시편은 이러했습니다. 이 시편은 수백 년 전부터 이 시간과 이 계기를 위해 쓰인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은 열한 제자와 함께 루카의 말로는 늘 하시던 대로 겟세마니로 향합니다. 그것은 분명 동산의 주인이 예수님이 그곳에서 밤을 나도록 허락했음을 뜻합니다. 예루살렘 가까운 주변에서는 수천 명의 평범한 순례자들이 노숙을 했습니다. 단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사항은 안식일 길에서 3000보 이내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카드론 골짜기는 그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예수는 돌담으로 에운 동산 입구에 제자 중 여덟 명을 머물게 합니다. 그리고 친근한 제자 셋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러고 나서 그 셋마저 거기 머물러 있게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척을 들을 수는 있으나 이 셋 역시 내적으로는 예수를 따르지 않습니다. 이제 그는 혼자입니다. 내가 기억하는 바 심리학에서 인간의 근본적 부담은 이별불안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유년기에서부터 그렇습니다. 이를 유기증후군이라고 한다던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에는 고도로 발달한 통신수단에도 불구하고 고립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노인사목에 종사하는 이라면, 나도 그랬듯이, 이 고립에 대하여 많은 체험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서의 그의 존재에서 우리네의 나락에 얼마나 깊이 내려갔던지 실패와 고립 공포를 그 어떠한 완화의 묘약도 없이 긑까지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는 그로 인해 수난하였습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다 겪어 내야 하거늘... 

더 나아가 예수님은 우리를 소스라치게 하는 더욱 어두운 그늘에 덮인 듯합니다. 그의 영혼의 밤은 하느님께 버림받는 체험에 이르기까지 짙어집니다. 그는 내심 앞으로 다가올 모든 것에 반항합니다. 가능하다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여기에는 더 큰 무엇이 달려 있습니다. 모든 어두움을 무릅쓰는 그럼에도 사랑의 가장 감격적인 실증이 그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두려움을 무릅쓰고 네 하는 사랑을, 인간들에 대한 숱한 실망을 무릅쓰고 믿는 사랑을, 악의에도 불구하고 보복을 모르는 사랑을, 고립에도 불구하고 모두를 위해 거기 있는 사랑을 당신 아들에서 실증하십니다. 이미 우리네의 일상에서도 그럼에도 사랑이 가장 위대한 사랑입니다. 동산에서의 어두운 시간에서 돌아온 예수님은 전혀 다른 분입니다. 이제는 결연하고 용감하며 정녕 초탈한 분입니다. 우리라면 그건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여러분에게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고통을 보고 우울해하던 그 역사 교수는 은퇴 후 남미의 한 가난한 나라로 가서 자기의 전 재산을 써 가며 극빈자들만을 위하여 헌신하였습니다. 이런 것이야말로 그럼에도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올리브 동산에서 보낸 시간은 위대한 시간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까우십니다. 우리에게 크나큰 위로이십니다. 

 

저는 어릴때부터 자그마한 꿈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나라의 어린아이들이 좋은 교육받을 수 있도록 함께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저는 교육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 역시 이 때문에 수단에 성당 대신 학교를 먼저 세웠습니다. 교육은 사람이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세워줍니다. 또한 그 힘들이 모여 내가 성공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해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런 제3세계 아이들이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습니다.  아직 마음속으로만 간직하고 있는 꿈이지만, 언젠가는 한 발자국 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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