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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욥기와 코헬렛 자세히 읽기

당시에는 아직 내세의 신비에 관한 하느님의 계시가 없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인들은 착한 행실에 대한 보상을 현세에서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현자와 의인에게 주어질 보상은 장수, 안녕, 많은 자녀, 풍성한 소출, 이웃에게 받는 존경 등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이 당신의 율법에 따라 지혜롭게 사는 이들을 축복하고 번영하게 해주신다는 징표였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백성이 내세와 죽음 이후의 보상과 육체의 부활에 대한 계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에 이를 때까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점진적으로 교육하셨습니다. 하지만 잠언이 기록될 당시에는 아직 이스라엘이 그런 계시를 감당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기 대문에 모든 관심이 현세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의 보상 개념은 내세적인 차원이 배제된 불완전한 것이지만, 참 생명과 행복은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다는 깨달음은 완전한 것입니다. 

 

욥기 

무죄한 이가 고통을 받는 이유는 천상에서 찾을 수 있고 하느님의 개입 없이는 그 고통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유 없는 고통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이유가 아직 지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누구나 사심 없이 하느님께 충실할 수 있는지 시험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욥기는 욥과 세 친구 그리고 엘리후가 나눈 긴 대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욥과 논쟁을 벌이는 이들은 당대에 통용되던 사상을 토대로 자신들의 주장을 되풀이하여 욥이 겪는 고통의 원인을 밝히고자 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을 네가지로 정리해보겠습니다. 

1. 하느님은 무죄한 이에게 고통을 주거나 멸망에 이르게 하실 수 없습니다. 

2. 죄에는 반드시 징벌이 따릅니다. 

3. 하느님은 욥을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서 허물을 찾아내십니다. 

4. 징벌은 죄를 벌하는 동시에 인간을 바로집게 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코헬렛 

기원전 3세기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코헬렛은 모으다 또는 소집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카할에서 유래했고, 회중을 모으거나 그 앞에서 가르치는 직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칠십인역 성경은 코헬렛을 회중 가운데서 말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해석하여 에클레시아스테스라고 옮겼습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이 명칭을 설교가 또는 전도자라고 해석하여 전도서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당시 코헬렛이라는 말은 설교가라는 직책을 가리키기보다는 자신의 깨달음을 전해준 한 인물의 고유명사, 곧 이름처럼 사용했기에 오늘날에는 이 말을 번역하지 않고 음역하여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코헬렛은 인생무상과 불합리한 현실에 대해 의문을 품으며 전통적 사상에 대해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러면서도 선한 이들에게 재앙을 가져다주고 악인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기이한 운명은 없다고 확신합니다. 코헬렛의 사상은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과 그분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시고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믿음을 토대로 형성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이 각 사람에게 그 행실에 따라 책임을 물으시고 되갚아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코헬렛이 확신하는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이 세상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코헬렛은 이성이 혹독한 시련에 놓인 만큼 이스라엘의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더욱 담대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강조합니다.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절망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갖고 계신 하느님께 대한 굳건한 신앙으로 시련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코헬렛이 가르치는 기본적 진리 세 가지

1. 인간의 지성이 자신의 행복과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신비를 깨닫기에 역부족이라는 사실은 하느님의 비추심을 바라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모든 사람이 기를 쓰고 차지하려는 재물은 참된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3. 재물이 참 행복을 줄 수 없다는 확신과 주장은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께 잊힌 존재'가 아님을 일깨워 줍니다. 하느님은 의인과 선한 이들에게 '재물'로 보상해 주시기 않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