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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선교가 문화 사업에 개입하는 이유

앵글로색슨인이 우리 독일인보다 훨씬 먼저 세상 물정에 눈뜰 수 있었던 건 선교와 문화, 문화와 교역 간의 연관성을 명확히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요동치는 동양의 사회 변동 과정을 오랫동안 추적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을 노려 다른 나라보다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지구의 반인 동양에서 강력한 식민 작업이 어떻게 추진되는지, 그 과정을 우리는 한국에서 일목요연하게 압축적으로 관찰했다. 

 

 한국은 일본의 융성을 목격하고, 그것이 서양 문화와 접촉한 덕분이라 여겼다. 밀어닥치는 이민족들에 맞서 국가로서의 자신을 지킬 희망이 그나마 남아 있었을 때는, 철저한 학교교육을 통해 서양 문화를 자기 것으로 만듦으로써 스스로를 구할 희망의 닻에 절망의 힘으로 매달렸다. 적어도 백성들은 그랬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이미 정치적, 경제적 정복이 진행되고 있었다. 한쪽으로는 미국이 들이닥쳤다. 전위부대는 선교였다. 미국은 이 나라를 정신적, 경제적으로 정복한 후 미국과의 통상에 묶어 둘 작정이었다. 다른 한쪽으로는 일본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대륙에 작전 기지를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자국의 재정 능력을 상회할 정도의 강력한 문화 정책으로 서구 문화를 격퇴하는 한편, 동양 정신을 되살려 그들의 원대한 국가 계획을 완수하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의 범위는 한국을 훨씬 벗어난다. 한국을 만주 정벌의 교두보로 삼았듯이, 일본은 우리 칭다오를 중국 정벌의 교두보로 삼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와 가까워질수록 극동은 엄청난 규모의 문화를 수용했지만 성향과 분위기는 바뀌지 않았다. 중국에서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근대식 교육과정이 설치되자 중국의 젊은이들은 도쿄로, 미국으로, 영국과 유럽 각구으로 유학을 떠났다. 곳곳에 초등학교와 전문학교가 설립되었다. 베이징 한곳에만도 200교에 이르고 재학생이 1만 7천만 명이다. 많은 것에서 너무 서둔다는 느낌이 들어, 혹여 허상을 좇는 건 아닌가 싶다. 일본은 지금까지 외형적 문화만 수용했을 뿐 그 문화를 지탱하고 보존하는 정신은 거부했거니와, 그럼에도 중국의 노력은 정신적 혁명을 통해 일본을 따라가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중국이 갈망하는 유일한 길이도 하다. 

 유럽 문화에 대한 이런 입장 표명을 통해 불타는 민족의식이 명료하게 드러났다. 이런 민족의식은 전에 없던 것이었다. 우선적 유럽식 교육제도를 통해 정신의 능력을 고양시킬 필요성을 분명히 인식했다. 학교와 학문을 매개로 서구 문화에 의존하는 현 상황은 과도기에 불과하다. 이 민족들은 서구에서 차용한 정신적 제도를 활용하여 외국 교사와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든지, 아니면 서구 문화에 순응하여 그 영향력 아래 안주함으로써 서양과의 관계를 지속할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학교에 그리스도교 정신이 스며들어 그리스도교 문화가 학교로부터 대중들에게 전파될 때만 기대해 봄직하다. 그게 아니라면 동양에서 서구 문화는 한순간 빛나다가 사라지는 유성처럼 허무하게 명멸하고 말 것이다. 

 영국와 미국은 현실적으로 물질적 자원 획득에 주안점을 두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그들의 회계장부를 들여다보지 못한다. '학교'와 '선교'라는 계좌에는 수입이 숫자로 기대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계좌로 지출된 막대한 금액으로 미루어, 영국과 미국의 재계가 선교와 선교 학교의 활용 가치를 얼마나 높이 평가하는지 추론할 수 있다. 거액의 재단들이 명문 대학을 설립했다. 한커우에 대학을 설립하면서 앵글로색슨 정신은 상하이를 넘어 중국 내륙으로 치고 들어갔다. 영국, 미국, 캐나다 대학들의 합작품이다. 상하이에서 번창하는 독일 의과대학으로 학생들이 유입되는 것을 차단하려고, 일부러 상하이로 가는 교통의 요지인 양쯔 강 유역에 설립 부지를 마련한 듯하다. 중국인들에게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서양 의학이다. 한국이 중국에서 받아들인 중국 의술과, 상하이 연안의 증기선에서 중국인 치과 의사가 녹슨 의료 기구로 수상쩍은 시술을 구사하는 장면을 내 눈으로 목격한 마당에, 의사가 턱없이 부족한 중국의 벌작함을 입증할 무슨 증거가더 필요하겠는가. 

홍콩은 대영무역의 중국 측 창구다. 영국은 홍콩에 대학을 설립했다. 이 대학의 임무는 명백히, 그곳에서 무역을 통해 당당하게 세력을 확보한 독일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산둥지역에는 미국 장로교와 영국 침례교가 함께 대학을 설립했는데 재학생이 벌써 400여 명이다. 칭다오에서 150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웨이 현을 설립 부지로 정했다. 웨이 현은 칭다오와 내륙 지방을 연결하는 철도 노선 상에 있다. 내륙 지방 학생들이 열차를 타고 칭다오 독일 대학까지 계속 가야 하는 수고를 덜어 줄 심산임이 분명하다. 미국은 독일의 계획 때문에 교육 분야에서 불이익을 당할가 봐 불안해한다. 이 걱정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도쿄다. 독일 예수회가 독일 전역에서 어렵게 모든 건축 기금을 투자하여 도쿄에 웅장한 대학 건물 첫째 측랑을 착공하기 무섭게, 록펠러라는 사람이 420만 마르크를 쾌척하여 미국의 경쟁력을 북돋았다. 40만 마르크까지 독일 예수회 대학과는 차원이 다른 사업이다. 

앵글로색슨의 경영인들은 국가 이념의 확산과 국가적 영향력의 증대를 위해 일하고, 선교를 후원하는 세련된 방법을 알고 있다. 영국이나 미국과 경쟁하고 비난하기에 앞서, 그들이 국가적 목표와 종교 사업, 이상의 추구와 물질적 희생의 내적 합일을 이룬 것을 묵묵히 경탄하고 인정해야 한다. 

 이들 대학이나 학교에서 정신을 매개하는 언어만 해도 엄청난 선전과 광고효과를 지닌다. 나룻배에서 증기선을 향해 "일 실링!"을 외치고 상어와 경찰이 있든 말든 돈을 주우러 물 속으로 뛰어드는 포트사이드나 아덴의 남루한 흑인 소년들부터 일본과 한국의 대신들에게까지, 영어는 영국의 명성을 홍보한다. 영국의 문화적 영향력과 경제적 성취가 이 명성에 달려 있다. 국제무역에서 언어는 조국에 유리한 노선을 취하라고 명한다. 언어 속에는 동양을 경제적으로 정복하려는 원대한 계획이 들어있다. 국제무역이 우선적으로 영국와 미국에 얽매이게 되는 것도 언어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전위에 선교가 있다. 

 식민 사업이 승승장구하면, 중국은 정치적 종속이 아니라 경제적 종속 때문에 인도와 운명을 함께하게 될지도 모른다. 인도에서는 카스트 제도에 기인한 내적 분열 때문에 정치적 식민화가 보다 용이하게 유지되었다. 마찬가지로 천 년 동안의 융합 과정을 거치면서 관념적 통일을 이룩한 중국도, 현재 내부 개혁에 지적 추동력을 제공하교 교역의 '기중기'를 성공적으로 작동시킨 나라에 경제적으로 종속되고 말 것이다. 그 '기중기'는 중국의 무진장한 지하자원을 영국으로 가져갈 것이다. 

 프랑스가 지금 중국의 선교 보호국으로서 올린 투자 수익은 우리를 아덴에 내려놓고 떠난 그 배가 가져다준 수익을 상회한다. 그 배는 중국에서 약 4천만 프랑에 상당하는 생사를 프랑스로 싣고 갔는데, 정부와 공장은 높은 관세와 두둑한 이익배당으로 임금을 지불했다. 이때 프랑스가 고급스런 취향의 대표국이라는 것이 크게 도움되었다. 그러나 영국제 상품들이 판치는 세계시장에 진출할 때는, 독일도 자국 제품에 일제히 Made in Germany 딱지를 붙여 내놓을 수는 없겠는가.  영국 무역업자들이야 Made in Germany 가 독일제이니 당연히 불매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극도로 복잡한 기계, 고강도 특수강, 물리학적 정밀기계, 순도 높은 화학 시료 등을 막론하고 견고한 독일제 공산품들이 일단 한 번 영어로 소개된 뒤부터는 독일어로 인쇄해도 장인들의 수공업은 물론, 독일의 공업과 과학의 명성이 전 세계로 퍼지게 되었다. 새로운 관계를 맺되, 일단 맺은 관계는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점에 있어 영국과 미국의 대기업들은 그들의 선교를 높이 평가하는데, 독일의 무역과 산업은 왜 선교에 그리도 무심한가? 

 지금 동양에서는 모든 것이 변하는 추세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만화경 속에서 색깔과 형태가 섞이듯, 인류의 4분의 1이 지난 4천 년 동안 전혀 다른 원리에 따라서 문화생활을 영위해 온 어느 한 세계의 완고한 원칙을 뚫고 새로운 서구 문화와 다양한 외교적 복안들이 파고들었다. 변화의 격랑이 가라앉고 어느 정도 꼴이 갖추어졌을 때, 동양이 독일이라는 나라에서 얻은 부가가치는 얼마나 강력할까? 독일의 선교사업이 전ㅂ반적인 국가 발전에 미친 영향력은, 독일이 차지할 몫의 비율을 결정하는 데 상당 부분 관여할 것이다. 

 동양에서는 독일의 참여를 점증적으로 요구하는 중요한 과제가 있어 불안하고 조급한 마음으로 분투 노력했지만, 우리 아프리카 식민지의 양상은 첫눈에도 전혀 달랐다. 나는 수평선 너머 저 멀리 북아프리카 해안의 불타는 절벽을 떠올렸다. 그곳도 여기 아덴의 암벽처럼 헐벗은 채 여행객들을 맞이했고, 가엾은 염소들이 풀을 찾아 헛고생만 하다가 고작 바닷물이 증발하여 쌓인 소금딱지나 핥고 있었다. 계속 남하하면 비독한 지대가 나온다. 우리 독일령 동아프리카다. 과거의 모습도 떠오르고, 기억 속에 각인된 색채도 금방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선은 고요하고 색은 청명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문화적 과제와 국가적 목적도 큰 틀에서 보면 우리가 방금 떠나온 곳의 불안정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동양의 오랜 문화민족들 속에서나 아프리카의 미개민족들 속에서나 독일은 늘 하나의 문화적 과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맡겨진 의무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그 과제는 더욱 엄중한 것이었다. 우리의 흑인 민족에게 미치는 영향이 명백할 터이므로 더 확실한 결실을 얻을 것 같았다. 식민정책의 목적은 분명했다. 원주민의 문화적 개선과 채산성 있는 식민지 조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