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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고요한 아침의 나라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가 조선을 다녀간 후 남긴 서문

1911년 초, 한국에서의 최근 선교 사업이 몹시 염려스러워 나는 거친 바다로 나아갈수밖에 없었다. 극동행 배가 아덴 항을 떠나자 신천지가 열리기 시작했다. 싱가포르, 홍콩, 상하이에 제대로 적응하려면 콜롬보에서부터는 동방의 낯선 햇살에 서서히 길들여져야 할 것이다. 증기선은 외로이 파도를 갈랐다. 이제 나의 펜도 평온한 시간을 찾았으니, 급격한 변화에 쉬 날아가 버릴 인상들을 능히 붙잡아 둘 수 있겠다. 그렇게 극동행 항해는 계속되었고, 매일 새로운 볼거리들이 나를 매혹시켰다. 동아시아도 이제 더는 서양의 정신 앞에서 넘지 못할 장벽 뒤로 숨거나 죽음의 포고령으로 다스려지는 닫힌 세계가 아니다. 그래도 유럽과 아시아 문화 사이엥는 여전히 색다른 세계가 존재한다. 

먼발치에서 동방의 문화 세계를 관망한 소심한 관찰자에게,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이 거대한 동방 제국들은 곧 멈추어 버릴 둔중하고 거대한 기계처럼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피스톤은 분주히 움직이고 바퀴는 힘차게 돌아간다. 아시아 문화라는 이 수천 년 늙은 거인은 서양에서 접합봉 몇 개를 빌려다 쓰고는, 새로운 기운으로 젊은 유럽과 그보다 더 젊은 아메리카를 뒤좇아 가고 있다. 유구한 문화, 신성한 전통, 온존하는 제도들이랑은 서둘러 밟아 뭉개 버렸다. 오래고 오랜 기억들이 수레바퀴에 깔려 으스러진다. 분명 새로운 싹이 싹트고 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삶이다. 하룻밤 사이에 사라져 버릴 옛것들을 윤곽이나마 원색의 붓놀림으로 잡아 두는 것도 보람된 일이 아닐까? 

특히 인구 1,800만의 작은 나라 한국은 아시아 거대 민족들의 틈바구니에서 존재감이 거의 희박해졌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점차적 영락의 길을 걸으면서도 고유의 독자성을 잃지는 않았으나, 최근 몇 년 사이 주권을 잃고 일본 제국에 병합되고 말았으니 이 격변기에는 자신을 지키기도 어렵게 되었다. 한국은 일본의 속국으로서 억지로라도 새 지배자에게 굴신해야 할 뿐 아니라, 겨레가 낯선 이민족에게 급속히 동화되는 모습까지 보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한반도 병합 이후 속절없이 흐른 몇 년 사이에 숱한 한국 민속이 사라져 버렸다. 아직 남아 있는 것들도 급격히 그 전철을 밟을 것이다. 

나는 변혁이 막 시작된 이 머나먼 한반도,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주유했다. 나의 지칠 줄 모르는 펜과 내가 찍은 사진들이 많은 걸 기록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모은 자료들을 힘겨웠던 내 과업에 대한 상급으로 여겼으므로, 귀향할 때 가지고 가서 나 혼자만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었다. 

내가 받은 인상과 옛 기억에서 건진 것들을 공개하라고 부추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이 압박을 꽤 오래 견뎌 냈다. 그러나 황급히 퇴락하는 옛 문화의 흥미롭고 가치 있는 잔해들을 세상에 알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 결국 내 고집을 꺾고 말았다. 나는 이런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한 민족의 문화 수준을 그 민족의 풍속과 관습에 대한 애정과 관심으로 재단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비통한 일이지만, 일본이 한국을 확고하고 평화롭게 점령하려 들겠다면 기왕 시작한 동화 정책을 계속 추진해야 할 것이다. 일본인들이 그 일에 쏟아 붓는 에너지로 보아 이 정책은 수년 내 완결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 기업의 과잉 생산, 한반도 종단 철도, 신설 공장들은 이 폐쇄적인 은자의 나라가 간직해 온 민족의 잔흔들을 조속히 말살시키는 데 일조할 것이다. 

새로운 풍조가 몰려왔다. 옛 성곽이 무너졌다. 장중한 성문도 헐렸다. 이로써 도성의 역사적인 면모가 달라졌다. 문화의 증거들은 포악하게 짓눌려 으깨졌다. 현대식 건물 사이로 우뚝 솟은 공장의 굴뚝들이 새 시대의 도래를 알렸다. 한국의 엄격한 옛 관습들은 자기네 섬나라 관습을 들여온 지배 민족의 강력한 영향 때문에 느슨해졌다. 

모든 것이 가고 또 오며, 사라지기도 하고 새로 생기기도 한다. 행운이 잇따라 찾아와 준 덕분에, 나는 몰락 위기에 처한 문화사적 가치들을 마지막 순간에 포착할 수 있었다. 이것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닐지는 장차 친애하는 독자들이 판단할 일이다. 나는 여기 수집된 자료 대부분이 다시는 이 정도 규모로 발견되거나 입수되기 어려우리라 감히 확신한다. 또 일부는 전혀 찾지도 못할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새 시대의 문화가 한국 고유의 중요한 옛 가치들을 너무나 신속하고도 무참하게 파괴시켜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순수 학술서를 쓸 생각은 아니어서, 이 책은 일기 형식을 취한다. 민속학의 영역을 적절한 방법으로 충분히 천착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이로써 쉽사리 면할 수 있겠다. 표현을 너무 매끄럽게 ㄷ듬으면 현장감이 죽는다. 사실 길 위에서 쓴 적도 많았다. 때로는 조랑말 위에서, 때로는 가파르고 험준한 산마루에서도 썼다. 당연히 글이 거칠고 서툴다. 그럼에도, 내가 가슴에 품고 돌아온 한국과 그 백성에 대한 나의 사랑이 이 책에서 읽혀지기를 바란다. 내가 직접 찍은 사진이 아닌 것은 작가 이름을 밝혔다. 그런 사진은 몇 장 안 된다. -1914년 6월 6일, 상트 오틸리엔에서- 

 

예전 왜관에 있는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곳에는 정선의 화첩들이 있었고, 나는 도대체 왜 이곳에 정선의 화첩들이 있는지 놀랍기만 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독일에서 그 기술을 전수받은 소시지 가공 비법과 출판사, 목공예, 밀납 등 여러가지 작업장들이 있어 그곳에 속해 수사님들이 일을 해내고 있었다. '기도하고 일하라'는 왜관수도원 수칙처럼 기도하는 시간 이외에는 수사님들은 모두 각자의 작업장에 속해 일을 하고 계셨다. 수도원 내를 산책하는 데, 나이가 많아 보이는 외국 수사님들을 몇 명 보았다. 나는 그들의 주름깊은 얼굴에서 행복을 보았다. 

바로 이런 천국같은 수도원이 우리나라 땅에 들어선 이유가 내가 위에서 글로 적은 베버 총 아빠스 때문인것 같다. 격변의 시기에 조선에 와 우리나라의 문화를 너무나도 사랑했던 외국인. 외국인의 눈으로 보기에도 엄청나 보였던 정선의 화첩은 우리나라에는 천만다행으로 그와 함께 독일 수도원에 머물다 이를 발견한 이대 교수님에 의해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되었다. 베버 아빠스가 이 화첩을 구매해가지 않았다면 우린 정선이 나이들어 완성한 진경산수의 절정을 목격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꺼져가는 조선의 문화 풍습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기록해놓았다. 단지 호기심의 시선이 아니라 진정으로 안타까워하는 사랑의 눈길이었다. 그가 조선을 여행하며 느꼈던 기행문이 바로 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