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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천주교 수도원장이 본 식민지 시대 국제 무역

국제 교역과 문화의 국가적 영향력 확보를 위한 식민지 개척에서, 전열의 최선봉은 세계 어디서나 선교사들이다. 성조기가 휘날리는 곳이면 더욱 그렇다. 미국 선교사들은 실제로 다른 어느 나라보다 국가 시책과 기업 활동에 더 많이 관여되어 있는 것 같다. 실용주의적 미국인들은 선교사들을 자기네 해외 사업을 간접적으로 대행하는 인력으로 여긴다. 따라서 선교 활동을 장려하고 물질적 후원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거기에 상응하는 보수를 지급함이 마땅한 것이다. 영국인들도 선교의 이런 의미를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프랑스조차 해외 선교와 그에 대한 보호 정책의 국가적 가치을 여전히 의식하고 있다. 물론 그리스도교에 대한 적대감과 해외 선교에 필요한 호의 사이에 적당한 타협점을 찾는 일은 프랑스에게도 쉽지는 않았다. 강베타는, 반교권주의는 수출품이 아니라고 선언함으로써 해법을 발견했다. 이 말에 기대어 프랑스는, 국내에서는 교회를 약탈하고 수도자들을 추방하면서도, 터키에서는 수녀들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중국에서는 선교사들의 타고난 보호자로 행세할 수 있었다. 식민지에서 소유권 말고는 더 잃을 것도 없이 도산해 가는 포르투갈 같은 나라들을 자국 선교자들까지 식민지에서 쫓아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현상은, 국가가 대외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신교가 발군의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확연히 드러낸다. 독일에서도 이런 인식이 점차 확산되는 추세이나 여론을 아직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했다. 

칭다오에서였다. 오랜 항해 긑에 다시 독일 땅을 밟으니 기뻤다 도시와 인근 지역을 둘러보고, 시내 뒷산의 수풀 우거진 오솔길에서 산책도 했다. 거기서 처음 독일어를 들었다. 남자 둘이 스치듯 지나갔고, 우리는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가 지나가기 무섭게 한 남자가 다 들리는 소리로 말했다. "저 작자들은 여기서 뭐하는 거야?" 이건 독일 스타일이다. 자기 생각을 대놓고 거칠게 드러내서가 아니다. 영국인들이 잘하는 말로, '신사적'이지 못해서도 아니다. 단순한 실언인데,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게 옳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그 남자한테 화가 났겠는가? 그 남자가 아니라, 그 남자가 드러낸 생각에 화가 난 것이다. 그는 선교사들의 종교 활동, 도덕적 승리와 진출에 대해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독일인으로서, 더구나 재외 독일인으로서, 선교의 국가적 의미에 대해 한 번이라도 애써 숙고해 보았다면 선교를 그리 평가할 수는 없었으리라. 적어도 미국인이나 영국인이었다면 그렇게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교가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독일인 선교사는 식민정책이나 경제 계획에 종사하지 않는다. 선교 고유의 영역은 종교 영역으로 정확히 국한된다. 이 영역을 넘어서면 적어도 동아시아에서는 처벌을 면하기 어렵다. 선교사는 정부가 비밀리에 파견한 요원들이라는 둥, 자국 선교사들이 먼저 정신적 침략을 완수해 놓으면 정부가 등장하여 그 나라를 집어삼킨다는 둥, 이런저런 해괴한 풍문이 그곳 동아시에서는 꽤 오래 영향을 끼친 듯하다. 이 악의적 정보가 1623년 일본의 핏빛 그리스도교 박해를 야기했고 한창 꽃피던 그리스도교를 말살하는 데 한몫했다. 적어도 이런 의혹때문에 중국도 선교를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교는 어떤 정치적 목적도 좇아서는 안 된다. 선교는 스스로 포기하거나 그 효과를 문제 삼지도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독일 선교사는 독일인으로서 자신의 존재와 활동과 성취를 통해 조국에 바람직한 이득을 창출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이득이 선교사에게 수고와 노력을 배가시킬 추동력이 되지는 않을까? 이 이득이 선교사에게 수고와 노력을 배가시킬 추동력이 되지는 않을까? 그리하여 선교 사업에 조국이 베푼 도움을 더욱 감사히 여기게 되지는 않을까? 선교사나 상인이나 사정은 매한가지다. 상인에게는 단연코 개인의 이익이 무엇보다 강력한 추동력이다. 애국적 열정 때문에 장사를 망각하는 상인은 드물다. 그런 건 도리어 국가 이념에 도움이 안 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조국이 그들을 필요로 할 때 제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선교도 이와 비슷하다. 가장 고귀한 이상인 종교를 부동의 목표로 상정하는 것이 선교의 보편적 능력을 침해하는 약점은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교를 더 널리 전파하는 의무에 충실할수록 선교는 국가 이념의 구현에 더 큰 업적을 남길 수 있다. 선교가 자신의 의무 영역에서 방향 전환을 시도한다면, 스스로를 포기하여 자신의 힘과 존재 이유와 존재 자체마저 잃게 될 것이다. 이것은 시인의 말 한마디로 넉넉히 표현된다. "먼저 신에게, 그다음 조국에". 독일 정신을 세계에 널리 전파함으로써 조국을 이롭게 하겠다는 올곧은 소망과 진정한 의지는 당연히 선교 활동의 의무에 포함된다. 독일 정신이 완벽히 가치로운 문화적 의미로 무장하고 세계로 뻗어 나가려 할 때, 이 원칙은 환영받을 만하다. 

 독일이 세계무대에 공식 등장하여 다른 민족들에게 전달하는 문화는 문화적 가치들의 단순한 집적물이 아니다. 말하자면 세계시장에 내놓았을 때, 품질을 이모저모 따져 보고 쓸 만하면 사 가는 원목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푸르게 살아 있어서 늘 새로운 열매를 맺고, 그 열매를 베풀어 다른 곳에서도 같은 생명이 자라기를 바라는 튼실한 나무와 같다.  썩은 가지들은 떨어져 부서진다. 더는 맥동하는 생명을 느낄 수 없다. 나무는 뿌리 깊은 곳에서 생명을 얻고 자란다. 그 뿌리가 그리스도교와 서양문화이며 삶이 원칙도 그 안에서 지켜진다. 민족 간에 교류되는 문화 가치는 외척 현상일 뿐 문화 그 자체가 아니다. 문화 자산을 쓸모 있고 복되게 만드는 것은 엄격한 도덕성, 숭고한 내면, 강건한 정신, 고귀한 세계관이다. 이를 통해 문화는 '고압전류'가 흐르는 문화적 산물을 '상용 전기'로 바꾸는 정신의 변압기 구실을 한다. 

 생활양식의 전제 조건을 형성하는 것은 삶 그자체다. 흑인이나 남태평양 섬사람의 원시적 습속에 강압적으로 개입하든, 기술적 성취 때문에 동양 민족들이 요청하든, 정치적 위세 때문에 본보기로 각광받든, 모름지기 서구 문화가 축복처럼 큰 걸음을 내딛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그리스도교가 삶의 토대를 구축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 식민지에서처럼 확고한 영토 점유가 중요하든, 정신적 문화적 경제적 상업적 자산이 중요하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문화 진출의 후속타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에서나 일본에서나, 그리스도교 사상이 불교와 국가 통치 이념인 유교의 부흥기도를 극복하고 동서양의 정신적 격차를 해소시켜 주든지, 아니면 동양 민족들이 서양 문화의 몇몇 산물과 유럽 헌법 몇 조항을 조악하게 모방하는 선에서 만족하고 서양과의 모든 교류를 다시 중단하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일본에서는 불교와, 중국에서는 유교와 대결해야 한다. 중국은 지금까지 속국인 조선에서조차 통용되던 과거제도를 폐지하는 특단의 조치를 단행했다. 그 기상천외한 방식 때문에 우리는 중국의 학문 풍토에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과거제도는 2천 년 동안 전 중화제국을 공자의 세계관으로 결집시킨 정신적 권력을 대변해 왔다. 유교 사상에 기반한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누구도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없다는 근본 원칙이 붕괴되었다. 이 국가적 원칙은 황제의 옥좌를 지탱해 주었고, 황제는 공자의 가르침을 국교로 보호했다. 이 원칙의 포기는 황제의 위상에 영향을 미칠 것이며 그 반작용이 국교에도 가해질 것이다. 전진이냐 후퇴냐, 중국은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 있다. 물론 중국은 유교를 근본으로 한 근대화를 추구한다. 과거의 문화적 삶을 온전히 보존하면서 서구  문화의 성과물만 취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들에게 삶을 부여하는 것은 정신인바, 정신이 결여된 외형적 문화의 산물은 오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화의 산물이 삶의 원칙인 그리스도교를 벗어나 낯선 존재에 접목되면, 수액이 동화되지 않은 채 줄기에서 전혀 다른 종류의 생명력을 뽑아내야 하는 접붙인 가지처럼 마르고 시들에 된다. 

 이것이 선교가 문화 사업에 개입하는 이유다. 선교가 앞장서지 않으면 동양에서 독일 문화의 약진도 멈춘다. 독일 정신도 퇴행할 것이고, 독일의 이권과 그로부터 창출되는 이득도 고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