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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올리브동산에서

우리는 이 그리스도 묵상에서 다른 어떤 것도 가볍게 여겨지는 그러한 주제에 다가섭니다. 고난이 그것입니다. 살다 보면 불쾌하거나 역겨운 일도 인생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때로는 할 말을 잃게 하는 형태의 인간 고통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가차 없이 죽음으로 몰아붙이는 자연 재난의 파급일 수도 있고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인간의 잔악이나 무책임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이없는 묵언 중에 이런 우울한 의문이 고개를 들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을 허락하는 신이라면 무슨 신인가. 
 믿음의 이러한 흔들림은 인류의 대재앙을 보고 일어날 수도 있고, 개인으로서 겪는 비운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개인으로서 겪는 비운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엄마를 아이들에게서 앗아 간다면, 에이즈가 가족과 고장을 황폐화한다면, 뇌종양이 사랑하는 사람을 못 알아보게 바꿔 버린다면, 희망의 여지가 없는 진단을 내가 받는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불운이 단골로 따라다니는 가족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우리가 평생 잊지 못하는 경악의 기억들도 있습니다. 나 자신이 사투로 지켜 낸 숲속에서 수천 명 전우의 주검을 보초 서며 지새운 영하 50도 혹한의 저 밤을 결코 잊지 못합니다. 나이 열여덟에서 스물여섯의 젊은이 수천 명, 저마다 어머니 아버지와 젊은 가정, 남매, 애인을 찾아 귀향하기를 고대하던 그들... 인간 광기의 이토록 끔찍한 결말은 나이 들어 늙도록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그런 참극에서 어느 만큼 거리를 두면 생각이 오히려 더 맑아져 의아하고 헷갈리게 되는데, 실상황에서는 살아남기에 바빠 생각을 널리 펴 볼 여지가 없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입니다. 뿐더러, 곧 닥쳐올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실제 고통보다도 오히려 더 견디기 힘들기도 합니다. 우리들 중 그런 경험을 해 본 사람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알던 한 사람이 있었는데, 아주 다정한 동창으로서, 그 자신이 중증 상이군인이면서 열정적으로 역사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는 조용하고 외로이 지내는 인간이었는데, 교직 생활을 마쳐 갈 무렵 나와의 사담에서 이렇게 자백하는 것이었습니다. "너 있지- 세계사 라는 건 사실 끔찍한 거야. 나는 어디서나 인간들의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맞부딪쳤어. 우리는 임금들, 정복자들, 전쟁과 승리 이야기를 하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어김없이 고통이 넘쳐흐르지.."

 성서도 말문 막히는 고통을 알고 있습니다. 욥기도 이 물음을 하늘에 대고 던지지만, 하느님이 무한히 더 위대하시기 때문에 결국 승복으로 끝납니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이 물음을 비켜 가지 않았습니다. 이를 위해 한 시간을 택하였습니다. 그 시간에 그와 가까운 이들은 불가능하리라 여겼을 일이지만, 예수의 영혼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고 들여다보는 것이 이제는 허용됩니다. 항간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생각에는 예수가 겉으로만 인간이고 영신적으로는 언제나 광대무변한 하느님 의식과 영광 안에 머물고 있으리라고 여기곤 했습니다. 하루는 초등학교 다니는 조그마한 소년이 내게 말하기를 예수님은 어차피 모든 일이 다 잘 끝날 것이라는 걸 아셨는걸요. 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올리브 동산에서의 시간은 그와는 다른 것을 가르쳐 줍니다. 

 

저의 생각 역시 같습니다. 인생은 기쁨과 행복보다는 슬픔과 좌절 등 부정적인 감정이 사방에 흩어져 있습니다.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인간은 이 고통을 숙명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거부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 어떤 선택을 할지라도 고통은 인간에게서 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삶의 태도를 취해야 할지 선택해야 하는것 같습니다. 고통을 우리가 보다 성장할 수 있는 요건으로 여길것인지 아니면 그저 피해야 할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야 할 것인지 말입니다. 저는 성장할 수 있는 데 필요한 것으로 여기며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대신 저의 눈을 예수님에게서 떼어놓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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