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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빛나는 승리자로서의 구세주

이렇듯 오늘날 구도자들에게 그리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런 사건들 가운데 나로서는 결국 어떤 것을 역사적 진실로 인정해야 되나. 성서에 보면 전설 형태의 문학 유형도 있고 신심을 돋우어 주는 이야기의 유형도 있으니 말입니다. 많은 성조들의 전기도 그렇거니와 예컨대 물고기의 배 속에서 시편을 읊는 요나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믿음이 있는 독자의 물음은 사건의 역사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뜻에 관한 것입니다. 그 뜻 안에 하느님의 계시가 숨겨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가난한 라자로의 이야기나 착한 사마리아 사람 또는 잃었던 아들 이야기를 들려준 경우도, 역사적 사건이 문제가 아니라 그 어떤 유식한 강론의 숱한 말보다 비길 수 없이 깊은 교화를 실현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수난사기의 경우는 어떠한가. 정말로 일어난 일들, 즉 역사적 사실인가. 거기서 주님에게 일어난 일에 우리의 신앙이 다분히 달려 있습니다. 거기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 정말로 수난하고 정말로 십자가에서 숨지고 정말로 부활하셨는가. 

 기본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비판적인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도 수난사기의 역사성을 상당 부분 인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수난사기는 짐작건대 복음 전승의 가장 오래된 부분입니다. 처음에는 구전되다가 나중에는 글로 정착된 것입니다. 수난 이야기가 사도들의 복음 선포에서 더없이 중요하였던 까닭이 있습니다. 그것은 큰 문제였습니다. 그 당시 유다교가 보기에 십자가형에 처한 자는 하느님의 저주를 받고 사람들에게 버려진 존재였던 만큼, 거기 메시아 및 주는 없었습니다. 구세주 하면 빛나는 승리자로 사람들은 상상하였습니다. 구세주 하면 빛나는 승리자로 사람들은 상상하였습니다. 종종 벌어지는 일로, 또다시 어떤 유다인 선동자가 감히 로마인을 거슬러 봉기했다가 십자가에서 최후를 맞으면 그런 자는 제아무리 스스로 메시아라고 주장하더라고 구세주가 아님이 당장 밝혀지곤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처형된 자의 유골은 여러 해가 지나서야 가족묘에 아치 허락을 받곤 했습니다. 로마인들은 평소 십자가에서 죽은 자들을 쓰레기 더미에 내다 버리도록 하였습니다. 십자가형의 효과가 유다인들에게 그토록 끔찍하고 굴욕적이었기에 로마인들도 이 가공할 형벌을 모반자들에게만 내렸습니다. 십자가형을 받는 자들은 신체적으로뿐 아니라 인륜적으로도 끝장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유다인들 가운데서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들의 난관이었습니다. 예수가 자원하여 고난을 맞았고 그러면서도 주님으로 머물렀으며 사람들 대부분이 기대하던 정치적 구세주가 아닌, 그러나 역시 모두가 기다리던 메시아였다고 선포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들은 수난사기에서 시종일관 실제적 추억을 모아 한데에 묶었습니다. 그들의 진술은 당시의 문체 따라 서민적인 어조로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경찰조서도 아니고 과학적인 묘사도 물론 아닙니다. 그 과정에서 그들로서 중요치 않게 여기는 사항은 대범하게 생략하면서도 결정적인 요소에는 집중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무슨 감상적인 이야기를 풀어놓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실제로 일어난 일들 중심입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생각케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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