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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수난사기 묵상에 임하면서

로욜라의 이냐시오의 수련에 보면 이런 영성 지침이 자주 나옵니다. "생생하게 상상해 보아라. 주님이 젊은이를 어떻게 살려 내시고, 눈먼 이를 어떻게 보게 하시는지, 산상수훈을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그대 자신이 마치 그 현장에 있는 것같이 상상과 심정을 살려 아주 생생하게 상상해 보아라." 이제 술회하려는 묵상에서도 이렇듯 생생한 예수의 모습이 나에게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슨 환상이나 독실한 자만에 기울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시대와 상황, 당시의 갈등과 문제 등에 관하여 실제적으로 알아보면서 오늘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전거를 바탕으로 그 실상을 드러내 보이고자 합니다. 이렇듯 나는 담담하게 나아가면서도, 우리가 그렇게 해서 한결 더 살아있고 깊이 있는 신심에 도달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예수의 수난 이야기는 모든 믿는 이의 삶에서 크나큰 몫을 차지합니다. 교회 전례력에, 특히 사순절과 성주간에 두드러진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과 묵주기도 고통의 신비에도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수난사기를 십자가 현양이나 예수 성심 금요일 또는 예수 성심 대축일 같은 날에도 기억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사성제를 지낼 때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신비롭게 현존하십니다. 십자고상마다 수난 이야기를 되살려 주고, 진부하도록 자주 쓰이는 십자가 상징에서도 그러합니다. 제대 십자가를 비롯 가슴 십자가나 목걸이 십자가에서도 그렇고, 탑 꼭대기나 지붕 위 십자가 또는 묘지 십자가, 적십자와 녹십자, 나아가서는 전사자를 기리는 흑십자가에서도 그렇습니다. 수난 이야기는 수없는 그림으로도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성당 안에 있는 십자가의 길에서, 순례 길 이곳저곳에서 로마네스크 시대에서 현대에 걸쳐 듀러에서 루오에 이르는 탁월한 세계적 예술 작품에서도 나타납니다. 음악에서도 수난 이야기가 드러납니다. 올리브 동산에서의 수난 성가 지극한 근심에 깊은 침묵 속에를 비롯 바흐의 주 예수 바라보라. 거룩한 머리 위에 피땀이 또는 하이든의 예수의 가상칠언 등 명곡에서도 들려옵니다. 수난사화가 품고 있는 매우 심오한 극적 감흥은 바로 우리 독어 문화권인 오버암머르가우나 티어세세, 에를 등지에서 이미 중세부터 수없는 관중을 끌어모아왔습니다. 수난사화를 주제로 많은 신심서적이 빛을 보았는데, 때론 의심스러운 사적 계시 따위도 섞여 있어 조심을 요합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선교나 교리 교육에서, 청소년과 어른들을 위한 신앙 교육에서도 어려움으로 다가오는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신약성경의 옛날 서술이 현대인에게는 많은 성인전이나 순교사화의 경우처럼, 막연한 전설에, 상당 부분 열심히 넘쳐 꾸며 낸 이야기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져 역사 사실의 핵심을 집어 내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우리들이 성금요일에 듣는 수난사기는 예수를 믿던 신심 깊은 사람들이 수십 년 후에 서술한 것이 아닌가. 그 이야기에서 얼마를 덜어 내고 얼마를 보탰을까. 복음사가들 간에도 세부 사항에서는 더러 모순되지 않는가. 그들중 한 사가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를 모두가 그를 저주했다고 하는가 하면 다른 사가는 뚜렷이 구별하면서 강도 중 하나는 그랬지만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았다고 하는데 또 복음사가 중 요한은 만찬에서 과월절 양에 관한 말이 없는데 다른 복음사가들은 분명 과월절 만찬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어떤 점들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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